한국일보

손글씨·종이책

2011-11-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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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언어도 생명이 있다. 어떤 언어들은 많을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났다가 전성기를 지내고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화로, 인두, 다듬잇돌…이라고 하면 어린이들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모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요즈음은 새 말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 중에‘손글씨’라는 말이 있다. 새 낱말이라기 보다는 엄지손가락으로 글씨를 만들거나, 기계로 친 글씨와 구별하기 위한 말이다. 전에 손글씨라고 하였다면, 그럼 몸의 다른 부분으로 쓴 글씨와 구별하는 말이냐고 반문하였을 것이다.

이 손글씨가 귀한 존재도 되고, 마치 시대에 뒤진 글씨 같은 느낌을 주는 요즈음이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중학생의 손글씨는 겨우 형태를 알아볼 정도였다. 손글씨가 드물어지자 ‘글씨는 그 사람 자체이다’‘글씨의 품격’‘글씨를 보고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등은 뜻을 잃었다. 이렇게 손글씨를 쓰고, 읽는 기회가 적어지면서 한편으론 귀한 존재가 되었다. 또한 메모와 편지는 손글씨로, 사무적인 서류나 기록들은 타자글씨로 구별하여 사용하는 지혜도 얻었다.


종이 위에 계산 연습을 수없이 거듭하여 수학적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 계산기를 이용하면 효과적이다. 손글씨 쓰기에 익숙한 사람이 글씨를 기계로 치면 필순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를 구성한다. 타자글씨는 손글씨가 기초이다.
‘종이책’이란 말도 시대의 산물이며, 전자책과 대조를 이룬다. 동물의 가죽에 글씨를 쓰거나, 댓조각에 글씨를 적고 그것을 엮어 만든 죽간을 거쳐 생산된 종이책은 인류문화의 금자탑이었다. 그런데 전자책의 출현으로 그 생명의 길이가 분명치 않다. 종이책을 폈을 때의 그윽한 애정과 달리, 밝은 빛 위에 떠오른 글씨들은 차갑게 똑똑하다. 많은 책을 탑재한 전자책은 휴대품으로 간편하고 값이 저렴한 장점이 있다고 소개한다.

우리는 문화 전환기에 서있음을 즐기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지나가는 문화를 붙들어도 한계가 있고, 잽싸게 앞서려고 새 물결을 타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글씨를 쓰는 것은 사물의 기록이나 자신의 지나가는 느낌을 글로 남기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손글씨도 좋고, 타자글씨도 좋다. 책을 읽는 목적은 책 종류를 선택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렇다면 때에 따라 책의 종류를 선택하면 어떤가. 선택의 범위가 넓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 변화와 활기를 준다.

손글씨를 보아도 여러 가지다. 연필글씨, 붓글씨, 펜글씨...등 필기도구에 따른 것이 있고, 크게, 작게, 예쁘게...쓰는 글씨 모습의 다름이 있고, 디자인 글씨, 개성적인...글씨등 창조적인 글씨도 있다. 책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종이책, 전자책, 헝겊책, 얇은 책, 두꺼운 책, 작은 책, 큰 책, 단행본, 총서, 전집...등이 있다. 이렇게 보면 이들 중에서 선택하는 개인의 행복을 느낀다.글씨 쓰기나 책읽기는 교육의 기본이 되는 도구이고 방법이다. 두 가지를 즐겁게 생활화하고 습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부모나 교사의 몫이다.

김 훈 소설작가는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가며 작품을 쓴다는 기사를 읽고 유쾌하였다. 작품 제작과정이 남다르니까 특색 있는 창작품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분의 컴퓨터로 글씨 치는 속도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각자의 목표에 따라 글씨 쓰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이며, 읽고 싶은 내용의 책을 종이책이나 전자책 중에서 고를 수 있는 자유를 향유한다.

그러나 여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원초적이다. 어린이에게 책을 고르라고 한다. 어린이가 물끄러미 책표지를 보고 있다. “퍽 재미있어” 그때서야 어린이의 눈이 글을 따라 움직인다. 어린이에게 필기 도구와 종이 한 장을 준다.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지?” 물으며 손가락으로 종이를 가리킨다. 어린이가 글쓰기를 시작한다. 어른은 소위 변함없는‘마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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