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가 남기고 갈 빈자리

2011-10-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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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주 영(주필)
지난 주말은 무아마르 카다피 얘기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8개월 내전 끝에 카다피가 마침내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압제에 시달려온 리비아 국민은 물론 온 지구촌이 들썩이는 분위기였다. 은닉해 있던 고향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총상을 입고 반군에 붙잡힌 카다피는 압송과정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어이없게 횡사하고 말았다. 27세 대위 때 쿠데타로 국가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라 철권통치를 해온 지 42년만이다.

카다피는 처음 자기를 알아본 반군병사에게 “쏘지 말라, 원하는 것을 주겠다”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는 악취가 진동하는 하수구에 혼자 은신해 있다 잡혀 나왔다. 거의 반세기 동안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던 무소불위의 독재자가 어쩌다가 그처럼 처참한 신세가 됐을까? 사람의 종말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심는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카다피가 여실히 보여주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인간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 둘째는 세상에 있으나 마나한 사람, 셋째는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봐줄 수 있지만 세 번째 유형은 이 세상을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다. 살인범, 강간범, 강도범, 유괴범들과 남을 울리는 사기꾼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들보다 더 나쁜 부류가 바로 카다피 같은 사람들이다. 통치수단, 아니면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국민들에게 혹독한 고통을 주며 테러로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한다. 히틀러, 스탈린, 오사마 빈 라덴, 김정일 같은 사람들이 저지른 해악은 몇 세대 후까지 이어진다.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본인이 스스로 어떤 형태의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자기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는 자기가 남기고 갈 빈자리가 더 잘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날마다 힘써야 한다. 꼭 후대에 이름이 남을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남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세상에 필요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번뿐인 삶을 기왕이면 제대로 살아서 세상을 하직한 후 주위로부터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성공적인 삶을 산 셈이다.인터넷에서 좋은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느 회사에 바보처럼 생긴, 그래서 동료들이 있으나 마나하게 여기던 한 직원이 있었다. 그는 후배들의 뒤치닥꺼리를 해주고, 아무도 손 안대는 서류함을 정리하느라 날마다 퇴근시간을 넘겼다.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쟁반에 여러 잔의 커피를 들고 다니면서 “오후도 즐겁게 보내세요”라고 인사하며 나눠줬다. 그 커피엔 설탕 대신 그의 미소가 한 숟가락씩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 직원이 부인의 병환으로 휴직하게 됐다. 동료들은 그가 휴직했다고 달라질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가 그가 떠나고 난 뒤 며칠 지나자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향긋한 ‘애프터눈 커피’는 간 곳 없고, 휴지통에는 늘 휴지가 넘쳤으며, 책상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였고, 캐비닛의 서류철도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오래지 않아 직원들은 짜
증난 얼굴을 보였고, 서로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큰 소리로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사무실에 감돌았던 화목한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 날 한 직원이 문득 ‘애프터눈 커피’가 그리워 그 휴직한 ‘바보’ 직원의 빈 책상에 갔다가 작은 메모지 한 장에 눈길이 멈췄다. 거기엔 “내가 편할 때는 누군가가 불편함을 견디고 있으며, 내가 조금 불편할 땐 누군가가 편안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의 작가 레오 버스카글리아가 자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는 가르침이 떠오른다. “인간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다. 인간은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카다피가 군림과 자기영달이 아닌, 섬김과 자기희생을 배웠더라면 적어도 개죽음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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