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누가 주인인가

2011-09-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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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있다. 사물의 경중이나 완급, 또는 중요성에 비춘 앞뒤의 차례가 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주인이 손님이 되고 손님이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한인사회에서도 그런 일을 종종 본다.자녀교육을 위해서 이민 왔다는 한 부부, 새벽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
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베비 시터에게 맡겨놓고 부부가 밤잠 설쳐가며 일해 돈을 모았다. 어느새 세월은 지나 다행히 이민생활은 자리 잡았다. 아버지 손잡고 디즈니랜드 구경 가고 어머니 품안에서 잠들고 싶었던 아이는 훌쩍 자라서 더 이상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 때문에 매일 늦게 들어와 아이에게 소홀한 것은 정작 아이가 소중한 지, 돈이 소중한 지 그 경중이 바뀌었다 할 수 있다. 부모자식간의 정을 쌓는 것도 다 때가 있는 것이다.

오는 10월 8~9일 열리는 뉴욕한인청과협회의 제29회 미동부추석대잔치와 KBS ‘뉴욕 코리아 페스티벌’ 장소가 28년간 열렸던 퀸즈 지역을 떠나 뉴저지 릿지필드 오버팩 공원으로 변경되었다.K팝을 주도하는 연예인이 총출동하는 ‘열린 음악회’ 공연에 수많은 관객들이 몰릴 것으로 예상돼 안전사고 위험상 랜달스 아일랜드에서 갑자기 행사 불허를 통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추석맞이 대잔치에서 친구 만나고 한국음식 먹으며 풍물을 즐기던 한인들은 모두 비싼 톨비와 개스비 지불하여 멀리 뉴저지 나들이를 하게 생겼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추석맞이 대잔치의 취지가 무엇이고 주인이 누구일까.
뉴욕한인사회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82년 향수를 달래고 같은 한민족임을 확인하며 2세들에게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한 취지로 시작되었고 해가 갈수록 참여도가 높아져서 1996년부터는 모국 농수산식품 박람회도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씨름, 성묘, 연날리기, 전통혼례, 태권도 시범, 고전무용, 청소년 장기자랑, 장수무대, 외국인 노래자랑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민생활의 설움과 스트레스를 씻어주었었다.옆집 세탁소 아저씨가 무대에 올라가 반짝이 재킷을 입고 노래하고 이웃집 딸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춤추고 같은 아파트 어르신이 구성진 가락으로 트롯트 부르는 것을 보며 손 아프게 박수도 쳤었다.

그런데 이민생활 하는 한인들에게 축제 마당을 제공하고 2세들에게 전통 문화유산을 계승한다는, 이 소박하지만 갸륵한 취지는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한국 연예인 공연이 주가 되고 있다. 추석맞이의 다채로운 행사를 버려둔 채 왜 모국 연예인 공연에 모든 것을 기대려 하는가. 물론 타인종도 참여하는 범세계적 행사로 커진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번 추석맞이 대잔치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한인동포인가, 한국 인기연예인인가, 아니면 한국 KBS인가?
그동안 청과협회에서는 KBS의 ‘열린 음악회’를 유치하려고 무던히 애써왔다. 그래서 드디어 그 결실을 맺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KBS가 뉴욕 한인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인터넷 서비스가 지금처럼 발달하기 전 수년동안 뉴욕한인들은 한국 비디오 최대공급처인 KBS아메리카 비디오 판매 수입을 엄청 올려주었다.

신기루 같은 연예인 공연이 뉴욕한인들을 위로해준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혹여 그날, 모든 것이 한국의 100여명 제작진이 와서 만드는 프로그램 스케줄에 의해 움직여지고 정작 한인들은 박수치는 엑스트라로 전락,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될 까 걱정된다. 물론 한국 연예인 공연이 있어야 청소년들이 몰려들고 장사가 잘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청과협회 회장만 되면 연예인 섭외하러 한국에 수시로 나가는 것이 일이었지만 너무 지나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메도우스 코로나 공원 숲가에 간이 천막이 쳐지고 고기 굽는 연기가 진동하고 이민 온 친구를 처음으로 잔치 마당에서 만나 환호성을 지르고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던 그 때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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