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체국이 사라지나?

2011-09-1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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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미국 우체국의 적자가 심각해서 금년 겨울쯤에 전면 폐쇄가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대안으로 여러가지 방법이 제기되었다. 3,700개의 우체국을 폐쇄하는 방안, 현 직원의 약 5분의 1인 12만명을 해고하는 방안 등이다. 뉴저지 주 페어론 시는 우체국 셋 중 둘을 폐쇄할 구체안을 이미 내놓고 있다. 컴퓨터에 의한 e-mail의 대중화와 UPS나 FedEx 같은 사설 통신망들이 우체국 이용자들을 빼내가고 있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 로스 알토스의 힐(Hill)씨는 50마일이나 되는 넓은 지역을 맡은 우편 배달원이다. 매일 삭막한 들길을 지나다가 꽃을 심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야생 들꽃의 씨를 구해서 차를 운전하다가 맘 내키는 곳에 잠깐 멈추어 하루 한 줌씩 꽃씨를 뿌렸다. 몇 해 후 그의 관할지역은 꽃으로 덮였다. 이런 우편 배달원들의 낭만과 수고가 사라질 날을 생각하면 기계화로 질주하는 문화가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요즘 우편물은 광고지가 너무 많아 받는 자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본래 우편함을 여는 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좋은 소식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 이사야서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가 산을 넘는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이사야 52:7)하는 시가 나온다. 승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전령(傳令)의 벅찬 가슴을 잘 표현하고 있다. Good news를 배달하는 자는 단순한 메시지 전달자가 아니라 기쁨을 전하는 천사인 것이다.

음악영화 ‘지붕위의 제금사’(Fiddler on the roof)에 나오는 유명한 노래 The Tradition(전통)이 있다. 주인공 데부이가 노래한다.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우리의 전통을 후세에 전달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개인도 민족도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바이올린을 키는 사람’처럼 그 장래가 불안하고 위태로워지리라.” 이 영화의 메시지는 개인도 가정도 민족도 좋은 전통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사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런던에 명물 거지가 있다. 지미 스튜어드 씨이다. 그는 손바닥에 ‘Thank you’라고 써붙이고 다닌다. 손을 내밀 때마다 Thank you를 동시에 전하게 된다. 이처럼 달라는 손도 있고 주는 손도 있다. 말리는 손도 있고 싸우는 손도 있다. 전달의 내역에 따라 메신저도 될 수 있고 거지도 될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죽으면 내 손을 묶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모든 사람이 나를 대왕이라고 부르나 내 손도 별 것 아니다’는 메시지를 조객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부활 후 예수는 자기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내 손과 발을 보라”(누가복음24:39)고 하셨다. 사람을 식별하려면 얼굴을 보는 것이 상식인데 예수는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 곧 희생의 자국을 자신이 누구임을 입증하는 신분증으로 제시한 것이다.

사람은 외모와 가진 것으로 평가될 수 없다. 어떤 희생과 고통을 통과하며 살았는지가 한 생애의 가치를 결정한다. ‘자신을 위하여 많은 것을 남겼다’는 비문이 새겨진다면 그것은 실패작 인생이다. ‘이웃의 가슴에 많은 좋은 것을 남겼다’는 비문이라면 성공한 인생일 것이다. 별로 희생다운 희생을 해보지 않고 죽은 사람은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성경말씀은 참 진리이다.

인간은 모두 ‘전달하는(pass-on)자’이다. 사람은 누구나 우편 배달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기쁜 소식을 전달하고 어떤 이는 슬픈 소식을 전달한다. 의욕을 전달하는 사람도 있고 좌절을 뿌리는 자도 있다. 평화를 심는 자도 있고 싸움을 일으키는 자도 있다. 사랑을 전달하는 사람도 있고 증오의 뿌리를 내리는 자도 있다. 그 선택은 남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자신이 한다. 불평을 일으키는 자보다 화해를 심는 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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