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9.11 사태의 또다른 교훈

2011-09-0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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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지난 2001년 9.11 테러 참사에서 살아남은 한 한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당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안에 있었던 그는 졸지에 비행기에 충돌당한 이 초고층 빌딩이 화염에 휩싸인 후 빚어진 탈출전쟁의 아수라장에서 매우 놀라운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다. 화급을 다투는 위기상황에서 놀랍게도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아시안은 아시안끼리 무리를 지어 계단을 내려오더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 역사상 미증유의 9.11 참사에서 한인들은 테러의 참혹성은 물론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고 강조했다. 만약 9.11사태 같은, 아니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다시 터질 경우 미국인들은 아마 더욱 밀착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사람들의 유유상종은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디즈니 만화영화 ‘라이온 킹’에서 보면 아프리카 평원에서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사슴은 사슴끼리, 얼룩말은 얼룩말끼리, 기린은 기린끼리, 코끼리는 코끼리끼리 떼를 지어 달아났다. 오래전 LA에서 발생한 4.29 폭동이나 두순자 여인사건, 또는 최근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대량학살사건과 영국의 폭동사건도 일종의 유유상종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소비에트 연방 붕괴 때 같은 민족끼리 똘똘 뭉쳐 한 쪽이 “우리 땅에서 나가라”고 요구하면 상대 쪽이 “우리가 왜 나가냐”며 맞서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평소엔 사이좋은 이웃이다가도 위기가 닥치면 민족끼리 단결하여 “너는 너, 나는 나”의 철천지원수 지간으로 돌변했다. 물론, 이런 상황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사회에서 일부러 조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유사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태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사전에 준비할 필요는 있다. 그 중 하나가 한인 커뮤니티를 위기에서 구해낼 리더십의 개발이다. 이런 리더십은 봉사기관의 성격을 띤 기존의 한인회장이나 사회단체장들로는 역부족이다. 수많은 인종으로 이루어진 이 미국 땅에서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 때 이를 뚫고 나갈 커뮤니티의 기둥이요, 목소리요, 한인사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지도력을 말한다.

미국을 제대로 파악하고 주류사회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고루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다른 커뮤니티의 습성, 문화 등을 이해하고 다른 민족들과 좋은 인맥을 갖춰 유사시 그들과 대화, 협상,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커뮤니티의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다. 한인사회에서만 통하는 한인회장은 바람직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 주류사회가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한인 커뮤니티의 대표성을 띠고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이나 시의원, 또는 주의원의 경력을 지닌 한인이 있다고 하면 그 한 사람의 리더십을 통해 한인사회 전체가 국가적 위기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한인들은 모두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그에 따라 커뮤니티도 와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은 2차 대전때 독일에 대항해서 싸워 이긴 영웅이었다. 그는 소수계 출신이었지만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대통령이 되었다. 통일된 유고는 온전히 그의 리더십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죽은 후에는 나라가 분열돼 내전으로 결국 국가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가 비록 소수계이고 아무리 타운이 작아도 돌발 상황에서 리더들이 타운의 힘을 응집시키고 연대시켜야만 한인사회 전체가 살아남을 수 있다. 한인사회가 시장, 시의원, 경찰관, 소방관, 나아가 단순 행정직 공무원들까지 무조건 다수 배출해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한인 커뮤니티의 리더십을 개발하는 길이요,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방법이다.

신문사 편집국 창문 너머로 시뻘겋게 불이 활활 타오르던 110층 쌍둥이 빌딩에서 뿜어져 나온 매캐한 냄새가 한동안 코를 진동하며 사라지지 않던 악몽의 9.11테러 10주년을 맞아 잠시 떠올려 본 생각이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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