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의 문턱에서

2011-09-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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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바람이 선선해지고 성급한 나뭇잎들은 어느 새 초록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가을을 쓸쓸한 계절로 그리는 시인들이 더러 있었지만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활짝 피어 단풍이 되었다가 땅에 묻혀 미래를 준비하는 그 숭고한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세월을 용감하게 맞이하고 삶을 진지하게 마무리하는 가을이 나는 너무나 좋다. 허리케인 아이린이 몰아쳤을 때 아주 못된 인간들의 이야기가 사진과 더불어 신문에 실렸었다.

뉴저지 주 로다이는 해마다 비가 오면 홍수가 나는 저지대이다. 이번에는 더 큰 홍수를 맞아 46번 하이웨이를 위시한 도로들이 물에 잠겼다. 어린아이들도 아닌 40대의 남자 셋이 카누를 타고 하이웨이에 나와 어디까지 카누로 갈 수 있는지 내기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물놀이는 10 분 만에 경찰에 저지되어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죄목은 ‘긴급 구호 활동 방해죄’였다. 모든 이웃이 홍수와 태풍에 시달리는데 그들은 장난삼아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을의 기쁨은 수확의 기쁨이기도 하다.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땀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계절은 흐뭇하고 마음의 풍요를 느끼게 한다. 인생에도 수확이 있다. 기쁨을 거두기도 하고 후회를 타작하기도 한다. 영광을 수확하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프르타크(Plutarch)영웅전’은 단순히 로마 그리스 시대의 영웅 열전이 아니라 영웅의 진화를 말해준다. 고대 영웅은 신에 가깝거나 야수와 인간이 합쳐진 반인(人) 반수(獸)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영웅의 이미지는 보통사람(Ordinary people)에 가까워지는 것을 이 책은 그리고 있다.

미국의 영웅들은 Volunteers(무보수 봉사자들)이란 말을 흔히 듣는다. 널리 나와 내 활동이 알려지지는 않아도 한 구석에 묻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 영웅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인생의 진짜 수확을 하고 있다.
희생 없이 진리가 전달되기는 어렵다. 죽어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모든 초목의 대 법칙이다. 그와 같이 자기를 내놓는다는 것은 모든 역사 발전의 대 원칙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취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버려서 얻는 열매이다. 얼마 안 가서 아름다운 단풍이 들과 산을 수놓을 것이다. 나는 단풍 속에서 숭고한 순교자의 모습을 본다. 여름 내내 무성한 초록색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던 잎사귀들이 마지막으로 한 번 화끈하게 자신을 불태우고 떨어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낙엽의 사명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어 죽어서도 봉사한다.

나는 어려서 연필을 깎을 때 측은한 마음을 품어본 일이 있다. 요즘은 기계로 두루루 돌려버리니까 생각할 겨를도 없지만 옛날에는 칼로 연필을 깎았다. 연필대가 연약한 심을 보호하고 있다가 자기의 몸이 야금야금 깎여 내려가며 사명을 다하는 모습이 얼마나 갸륵한가! 몽당연필은 희생과 아픔을 통과해 온 개선장군과 같았다.

나는 높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기도문을 적어보았다. “우리에게 오늘도 생명 주심을 감사합니다/ 덤으로 하루씩, 은혜로 하루씩/ 보태주시는 이 목숨/ 감사함으로 유익하게 사용하게 하소서/ 나를 믿어주는 이 있으니 더 진실하고/ 나에게 기대하는 이 있으니 더 부지런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이 있으니 더 겸손하고/ 나를 걱정해 주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는/ 오늘, 결실의 하루가 되게 하소서/ 팔 다리 성할 때 힘껏 사랑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동안 긍휼을 베풀며/ 나의 짧은 인생이 떫음을 남기지 않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여음이 되게 하소서/ 높은 가을 하늘처럼 보다 높이 바라보고/ 붉은 단풍처럼 열정적으로 불태우는/ 멋진 시간, 후회 없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오곡백과 거두어들이는 이 때/ 사랑의 열매 적음을 뉘우치오며/ 오늘도 덤으로 주신 생명 소중히 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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