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인과 오케스트라

2011-09-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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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영 (목사)

왕년의 스타 청년 찰톤 헤스톤은 ‘벤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더니 ‘십계’에서는 노련과 성숙한 노인 모세의 역할을 보여주어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것이 내가 소년때였으니 꽤나 오래된 얘기이다. 시간은 소년을 노년으로, 검은머리를 하얀머리로, 반숙을 완숙으로, 미숙을 성숙으로 맛있게 요리하는 요리사다. 흑백은 인생의 기본색깔이다. 흑백사진의 진미를 잘 모르지만 “검은머리 파뿌리 될때까지 행복하게 잘 살아라!”하는 주례가 끝나기도 무섭게 검은 보자기 덮어쓰고 유황가루 플래시 ‘퍽’터뜨리며 하얀 연기 뿜어내며 찍던 60년대 세기의 사진사 안셀아담이 찍던 그 흑백사진 속에서나 매력을 발견할 수 있겠다. 어떤 이는 흰색은 색이 아닌 것처럼 무시하다 수채화를 버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혼돈 속에 질서가 있는 미국과 유럽 교향악단을 특히 좋아한다. 그 이유는 손자뻘 같은 젊은 지휘자의 밑에 앉아 따가운 싸인을 한몸에 받으면서 구석구석에서 노숙하게 꿈틀거리는 흰머리 노인 악사들의 열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의 오케스트라는 노인들의 소리가 빠진 것같아 어딘가 모르게 불안함을 느낀다. 우리 한국 교향악단도 지금이라도 파고다 공원에서 장기나 두고 소일하는 왕년의 노인 악사를 재고용하여 노인이 있는 오케스트
라로 풍경을 바꾸면 어떨까. 동해안에서 마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처럼 평생 낚시만 한, 한 노인을 알고 있다. 그는 물속에 손만 넣어보면 그날 낚시 성패를 가늠할 수 있다 한다.


인생의 철드는 나이가 60이라고 고려장 하던 그때 누가 말했더라면 철들자마자 죽으란 말인가? 하며 항변하겠지만 이미 회갑잔치란 풍속도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에야 60이 인생의 시작이란 말이 실감난다. 이제 더 이상 ‘노인’은 ‘노는 사람’의 대명사가 아니다. 60전에는 철들지 못해 넘어지는 연습, 다투는 연습, 이별연습 등 인생리허설을 했다면 그후부터는 참 인생연주가 시작되는 나이이다. 이젠 결단코 넘어지거나 다투거나 헤어지거나 유혹 당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서울 살 때 붓글씨로 국전에 입선한 한 노인의 붓글씨를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글씨를 어떻게 하면 쓸 수 있습니까?” 물었더니 그 노인 왈 “아, 지금부터 붓글씨 배워야지요!”하였다. 나는 그날, 그 노인 학생으로부터 한 대 얻어맞고 돌아와 그동안 나의 소중했던 설교원고를 끄집어내 비평하면서 하나, 둘 쓰레기 통속에 다 집어넣어 버렸다. 목사도 60은 넘어야 설교가 나오고 성악가도 50은 지나야 소리가 나온다던데, 인생의 모든 직종인들 어찌 예외랴.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을 연주한다. 이 날은 특별하게도 두 지휘자가 경쟁이라도 하듯 지휘대결을 하고 있다. 한 사람 이름은 검정머리 청년 카라얀이고, 다른 한 사람은 흰머리의 노인 카라얀이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과연 청중들은 누구의 지휘에 더 열광했을까?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만해도 그렇다. 다행히도 헤밍웨이가 한 백발의 ‘노인’을 소설 주인공으로 등장시켰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청년과 바다’라 했더라면 그 소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이 ‘노인과 바다’를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는 이유도 그 악명 높은 자본주의 사회경제 구조악이란 상어에게 뜯길 걸 다 뜯기고 앙상한 몸으로 돛을 메고 귀가하는, 저 실패한 노인을 통해 어쩌면 비슷한 처지의 자신을 보기 때문인가?
어떤 평론가는 말하기를 돛을 메고 올라가는 저 노인의 석양에 비치는 그림자가 마치 십자가를 메고 갈보리 산으로 올라가는 예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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