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

2011-06-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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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연중 칼럼

일이년 후면 부동산 경기가 좋아질 것인지 아니면 지금보다 더 나빠져서 더블딥, 쉽게 말해서 주택가격이 한 번 더 급락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분들이 묻고 궁금해 한다.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학자나 연방준비은행의 버냉키 의장 같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확실하게 대답 못 할 질문임에 분명하지만 필자의 대답은 명확하고 단호하다. “더블딥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장, 즉 로컬에서 직접 부딪치고 뛰는 우리 부동산 에이전트들이 체감하는 분위기는 그 더블딥 하고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현금을 많이 갖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 아주 아주 어렵게 모기지 융자를 받는 것과, 무조건 아주 헐값에 나온 것만 찾는 바이어들 때문에 헛고생하는 일 같은 것만 힘들지, 그런대로 버틸 만하다는 것이 업계의 분위기이고, 지금보다 더 가격이 급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직업에서 오는 희망 섞인 긍정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최근에 조금씩 증가 추세에 있는 큰손들과 현금 투자들의 부동산 구입 의사나 계약들이 눈에 띄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하여튼 골치 아프고 불분명한 부동산 경기 전망은 그만 마치고 최근에 필자가 열다섯 권짜리 소설형식의 문학작품인 ‘로마인 이야기’를 두 번째 읽으면서야 새롭게 인식하게 된, 누구라도 조금은 흥미 있을 만한 두 인물에 관해 적어본다.
필자의 중·고등학교 시절엔 학생의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었었고, 그리고 대신에 1년에 한 두 번씩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관람했었다. 검정 교복에 검정 모자를 쓴 채로 줄을 서서 극장 안으로 들어갔었고 시끄럽게 떠들다 다음날 조회시간에 불려나가 혼났던 기억도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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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보았던 영화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영화 하나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본 영화인 ‘클레오파트라’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귀족 안토니우스역으로 나왔었는데 그 시대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는 제1의 권력자인 줄리어스 시저(카이사르)가 BC 44년에 정적 부르투스 일파에게 암살되면서 로마는 권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버린다.


이에 시저의 양자로 권력을 승계 받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암살과 전쟁을 통해 대부분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결국 가장 늦게까지 남은 안토니우스와 실권을 놓고 겨루게 되고, 로마의 권력은 2분되어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로마제국의 서쪽을 맡고,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맡게 된다.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 안토니우스는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을 하고, 이 때 마지막으로 두 세력 간의 다툼이 BC 30년의 악티움 해전이었다. 양측에 동원된 군함이 1,200척 이상이었다는데, 이렇게 스케일이 큰 멋진 전쟁장면뿐만 아니라 비스듬히 누운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운 모습과 독을 품은 뱀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후에 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사람이란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영화 속의 이집트 여왕의 모습이 왜 이집트 사람이 아닌 서양 미인이었을까, 아마 1970년대 할리웃 영화계에 여주인공을 할 만한 이집트계의 배우가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는 것 같은데(필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까닭을 알자면 그 시대로부터 300년 이상 전에 있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 전 356년에 태어나 323년까지의 33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면서 마케도니아 제국의 왕으로 ‘세상의 끝과 거대한 외해’까지 가겠다는 꿈을 가지고 동방으로 원정 침략을 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알렉산드리아 제국을 세운다.

이 원정으로 시리아, 이집트 등과 페르시아까지 정복하고, 정복한 나라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는데 그 중에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가장 크고 화려했던 도시였다고 한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셨던 알렉산더 대왕은 특별히 정복한 국가와 융합정책을 펼쳐 자국민들을 피정복국가로 이주시켜 그 곳 주민들과 결혼시켜 동서의 융합이 이뤄지게 된다.

그러므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된 후 300년 동안 이집트의 지도층은 정복자와 함께 들어온 그리스인들이었다. 즉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프톨레미우스 12세의 딸인데, 그 프톨레미우스 왕조의 권력 기반은 그리스계이다. 물론 알렉산더 대왕 자신도 페르시아의 공주인 다리우스 3세와 결혼을 한다.

이렇게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기가 되었고 이 절정의 그리스 문화가 세계로 퍼져나가 피정복지역의 문화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아시아를 휩쓸던 한류열풍이 유럽에까지 퍼지고 있는 것도 이런 문화적인 점령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대제국의 왕이었던 알렉산더 대왕, 트로이전쟁을 소재로 쓴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즐겨 읽고 특히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정한 일리아드를, 즉 단순한 전쟁사가 아닌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라는 철학적 명제를 잘 다룬 그 시대의 사상을 잘 풀어낸 명작을 전쟁 중에도 항상 베개 밑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정연중

(213)272-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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