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커지는 아시안 파워

2011-02-21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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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에게 그동안 아시안이 겪은 인종 차별 이야기를 하면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놀라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 차별의 역사를 극복하고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에 두 아시안이 시장에 취임했다. 미국에 대량 이민 온 대륙을 잇는 철도건설 때 온 중국노동자들의 후예일 것이다. 백인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중국 사람들은 마다하지 않아 환영을 받았으나 그들의 계약이 끝나고 이곳에 정착하려할 때 백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상거래의 귀재로 알려진 중국인들은 당시 샌프란시스코 세탁업계를 87%를 차지하여 중국인하면 의례 세탁소와 식당운영 을 연상하게 하였다. 계속하여 늘어가는 중국이민을 막으려고 이상한 법들이 제정되었다. 한 예로 세탁소는 목조건물에 설치할 수 없다고 한 조례 등이다. 당시 중국 사람들의 세탁소는 대부분 목조건물 안에 있었다. 위헌 판결이 났지만 여러모로 아시아 사람들의 숨통을 조이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삶의 거처를 마련했고 그곳을 벗어나면 백인 부랑자들한테 행패를 당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의하면 1900년 초 구한말 어느 왕족이 마켓 스트릿에 있는 호텔에 투숙하고 거리를 산책하다가 중국 사람으로 오인 받고 백인들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한국 왕족인 것이 알려져 시장으로 부터 공식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오클랜드의 차이나타운은 그랜드 애비뉴에 위치했었는데 백인들에 의하여 바닷가로 밀려났다고도 한다. 마티네즈 해안 중국 어촌은 어느 날 이유 모를 화재로 소실되며 없어진 다음 백인 동네가 들어섰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대 와이오밍 락 스프링스에서 중국사람 학살 현장이 발견됐다. 철도공사를 마친 중국 노동자들의 정착을 막으려는 백인 소행이라고 알려졌다.

조선 유학생이 오기 전까지 한인 동포들은 중국 사람들 상대로 한 인삼소매업이 고작이었다. 그들도 삶의 근거지는 일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차이나타운을 벗어나지 못했다. 도산의 리더십으로 삶의 질을 향상 시킨 것 등은 우리가 잘 아는 일이며 이곳에서 우리의 권익을 대표하는 흥사단이 설립되기에 이른다.

이민 선배들이 겪은 고초와 삶을 알게 되면 지난 역사뿐만 아니고 오늘과 내일을 알 수 있는 지혜도 준다. 이런 차별 속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2차 대전 때 일본인 수용소에서 10대를 지낸 노먼 미네타가 산호세 시장에 당선되며 아시아 정치 지망생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그는 후에 하원의원을 거처 부시 정권에서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지역의 경사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의 시장으로 두 중국계가 취임한 일이다. 에드 리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경합으로 된 시장은 아니지만 개빈 뉴섬이 부지사가 된 다음 시의회의 전폭 지지를 받으며 시장으로 추대 받게 되었고 오클랜드의 진 콴은 당당한 경합을 거쳐 거물 정치인 단 페라타를 물리쳤다.

이렇게 차별 받고 성장한 이들이 꿈을 잃지 않고 정진한 것은 커뮤니티를 위한 그들의 포부와 헌신이었다. 이들의 배경을 보면 자기 커뮤니티만 위한 일 이외에도 다른 소수 민족을 포함한 헌신이었다. 진 콴 시장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한국 근로자를 위하여 싸웠고 흑인 지역에서 방과 후 과외를 돕기도 했다. 그리고 에드 리 샌프란시스코 시장도 아시안 법률 코커스에서 10년간 봉사하다가 아그노스 시장에 뽑혀 시정부에서 일하게 된다.

20대에 차별받는 소수민족을 위한 일꾼들이 이제 정치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프리몬트 법원의 우리 3세 탐 서 판사도 이 기구 출신이다. 이런 지도자들을 키우기 위하여 아시아 단체들이 한 노력이 대단 했다. 그리고 매리 정 하야시주 하원이나 제인 김 샌프란시스코 의원도 이들 단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도 한인사회 안에서만 안주하지 말고 아시아 단체나 여러 소수민족과 연계할 때 우리의 미래가 있고 지난날의 차별을 거울삼아 밝은 내일을 개척할 수 있겠다.


이종혁

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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