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정사회의 벌금제도

2011-02-10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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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82세인 한인 한모씨는 지난달 교통위반 티켓을 받았다. 가든그로브 길을 운전하던 한씨는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에서 달려오자 길옆으로 차를 빼 세웠다. 그때 한 경찰차가 다가와 곧바로 정지하지 않았다며 한씨에게 교통위반 티켓을 발부했다. 자신은 제대로 법규를 지켰다며 짧은 영어로 항의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얼마 후 한씨는 법원으로부터 벌금고지서를 받았다. 무려 400달러였다. 고지서를 받은 후 그는 걱정과 울화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법원으로부터 날아 온 벌금액은 한씨의 한 달 수입의 전부인 웰페어 800달러의 절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통역을 물색해 법원에 나가 판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선처를 호소할 생각이지만 판사가 자기 얘기를 들어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씨가 만약 핀란드에 살았더라면 이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핀란드는 소득 수준에 따라 벌금액을 정하는 ‘일수벌금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수벌금제란 위반의 경중에 따라 일수를 정한 후 소득에 따라 하루 벌금액을 산정해 곱하는 방식이다. 같은 위반이라고 해도 소득에 따라 액수가 크게 달라진다.


몇 년 전 핀란드 최고기업인 노키아 부회장이 할리 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다 과속으로 걸려 11만6,000유로의 벌금을 내 화제가 됐다. 미화로는 무려 16만달러이다. 벌금은 그의 14일치 봉급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군소리 없이 벌금을 냈다.

소득에 관계없이 동일 범죄 혹은 위반에 같은 액수의 벌금을 내는 제도는 ‘총량벌금제’라고 한다. 한국과 미국은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일수벌금제를 채택하거나 고려하고 있는 추세다. 총량벌금제가 안고 있는 징벌효과의 한계가 이유다.

가령 어떤 위반에 대해 노점상에게 100만원의 벌금이 선고된다면 이것은 그의 생계를 뒤흔들 정도의 가혹한 처벌이 된다. 하지만 연봉 수억을 버는 사람에게 이 정도의 벌금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재벌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벌금의 기본 취지가 징벌과 재발 방지에 있다면 제대로 기능하는 제도라 보기 힘들다. 복지 선진국인 판란드와 스웨덴 등 북구 국가들은 20세기 초부터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독일과 프랑스 등은 수십년 전 일수벌금제를 도입했다.

일수벌금제가 제대로 시행되려면 소득이 정확히 드러나야 하는 등 사회적 투명성이 전제돼야 한다. 핀란드에서는 경찰이 교통위반 차량을 세운 후 가장 먼저 “당신 소득이 얼마냐”고 묻는다. 소득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풍경이다. 한국에서 몇 년 전 일수벌금제 도입이 추진되다 주춤하고 있는 것은 소득 투명성에 대한 불신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완전한 일수벌금제는 아니더라고 재산 상태에 따라 벌금 액수를 차등화 하는 방안을 현재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의 총액벌금제는 잘못 운영되면 한국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인식을 더 확산시킬 우려가 있다. 일수벌금제로 가는 중간단계로나마 경제적 상태에 따라 벌금액수를 달리해 주는 안을 시행한다면 공정사회 구현에 부합한다.
그리고 미국보다 한발 앞섰다는 평가도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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