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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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칼럼/ 옛 월드 트레이드 센트 자리를 뒤돌아보며

2010-03-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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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삼(소유디자인그룹 대표)

요즘 한창 인기있는 사극들은 실제 내용 뿐만이 아니라 야사와 가공의 이야기들로 살과 뼈를 덧붙여 시청자들의 호기심과 재미를 증가시킨다. 때아닌 폭설과 진눈깨비의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 필자는 우연치 않게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의 공사현장을 지나게 되었다. 학교 재학시 지도 교수였던 리베스킨(Daniel Libeskind)교수의 매스터 플랜이 선정된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공사 진척 상황은 너무나도 더딘 것을 실감했다.

개발업자의 눈에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이기 보다는 작품성에 더욱 치중된 당선작품에 대한 불만이 현 경기 침체와 맞물려 진행상황이 너무 느려지게 되지 않았나 내심 추측해 본다. 이번 기회를 통해 지금은 없어진 옛 월드트레이드 센터(World Trade Center)의 계획 전반에 걸친 숨겨진 야사들과 2001년 9월11일 이후의 진척 상황에 대해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건축적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2001년 9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파괴된 후 현재 6개의 고층 건물동과 1개의 기념동의 공사가 진행 중이다. 튜브 프레임 구조(Tube-Frame Structure design)를 사용한 110층의 이 쌍동이 건물(Original World Trade Center)은 1960년대 초 미노루 야마사키(Minoru Yamasaki)에 의해 설계됐다.


1966년 8월5일에 첫 삽을 뜨기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970년 12월에 북쪽 타워(The North Tower)의 완공을 시발로 1971년 7월 남쪽 타워(The South Tower)의 완성과 함께 메리엇 센터(Marriott World Trade Center), 4트레이드 센터(4 World Trade Center), 5트레이드 센터(5 World Trade Center), 6트레이드 센터(6World Trade Center; 현재 미국 관세청이 자
리잡음, United States Customs), 그리고 1985년에 완공된 7트레이드 센터(7 World Trade Center)로 구성되었다.말도 많고 탈도 많은 건물동 들이었다. 1975년 2월에는 큰 화재가 발생했고 1993년에는 폭탄 테러가 있었다. 그 후 포트 오소로티(Port Authority)는 민간 매니지먼트사를 통한 건물 리스
운영을 결정하였고 2001년 7월에 실버스타인 매니지먼트사(Silverstein Properties)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두달 후, 2001년 9월11일 오전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집단(Al-Qaeda-Affiliated Hijackers)은 2대의 767제트 비행기를 탈취 자폭을 자행했다. 기록에 따르면 약 56분간의 화재 이후 남쪽 타워가 붕괴되었고, 30분 가량 시간이 흐른 후 북쪽 타워가 뒤를 따랐다. 오후에는 7트레이드 센터(7 World Trade Center)가 붕괴되었다. 나머지 건물동들은 너무나 심한 피해로 복구가 불가능 하다고 진단되었다고 한다.

2,75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사고 현장을 치우는 데만 무려 8개월 이상이 걸렸다. 고인들의 명복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빌며 시간을 1946년으로 돌려 보자. 월드 트레이드 센터 계획안은 1946년에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뉴욕 주는 그 계획안을 통과 시켰다. 그러나 통과 된 계획안은 3 년간 방치되었다.
그 당시 뉴욕은 미드 타운 개발에 정신이 없는 시기였다. 당연히 다운타운 개발안은 찬밥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 록펠러가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961년 대중에게 계획안이 공개되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위치와는 정반대인 이스트 리버(East River)쪽이었다.

에이전트인 포트 오소로티는 뉴욕 과 뉴저지 양 쪽 주지사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뉴저지 주지사 로버트 메이너는 3억3500만달러 규모의 이 개발안을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엄청난 투자 규모에 비해 뉴저지가 가질 수 있는 이득이 뉴욕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 당시 뉴저지 주지사로서의 정치적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뉴저지의 허드슨과 맨하탄으로의 기차 이용객들의 숫자 또한 1927년의 1억1300만달러에서 1957년에는 2600만달러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정치라는 것이 항상 그렇듯이 1961년 12월, 새롭게 당선된 뉴저지 주지사인 리차드 휴그 (Richard Hughes)와 포트 오소로티 디렉터인 오스틴 토빈(Austin J. Tobin)은 허드슨&맨하탄 철도청을 포트 오소로티와 합병, 그 이름을 포트 오소로티 트랜스-허드슨(Port Authority Trans-Hudson; PATH)이라 명칭하고 개발부지 또한 동쪽 강변(East River) 쪽이 아닌 지금의 위치인 서쪽 강변(West River)쪽으로 변경하여 뉴저지 출퇴근 시민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마침내 이 개발안에 동의하였다.
역사는 다음 칼럼에서 계속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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