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 - 머리가 바빠도

2010-02-1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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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조깅하는 사람들이 많다. 2층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면 걷고, 달리고, 개를 끌고, 유모차를 밀고… 열심히 왔다리갔다리 한다.

천천히 다리만 움직이는 사람은 거의 외국인이다. 머리가 좋고 부지런한 한국 국민은 대부분 일석이조형 운동을 한다. 두 팔을 쉬지 않고 돌리거나 허공에 대고 펀치를 해대는 섀도우 복싱 동작을 하거나 허리에 양손을 짚고 목을 앞뒤로 꺾거나 홰홰 돌린다. 이 모든 것이 두 다리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도중에 일어나는 동작이다. 운동효과의 극대화 정신이 존경스럽다.

나는 좀 천천히 걷는 편이다. 이웃집에 새로 심은 나무도 구경하고 새로 칠한 페인트 배색도 본다. 옆집 미국인 아저씨는 ‘빠르게 걷기’ 취미가 있다. 나만 보면 “헤이, 범수! 한판 붙을까?” 묻고는 눈썹 휘날리게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한다. 나도 속도를 낸다. 질 수 없다. 출근 전에 날마다 개인 트레이너를 두고 운동을 하는 이 불사조 아저씨의 나이가 70세이기 때문이다.


‘한국 여자들은 모두 날씬하고 참 이쁘다’고 그가 말한다. “범수! 여자들에게 한국말로 어떻게 인사하지?” 가르쳐준 대로 며칠 연습을 하더니 어느 날 실습에 나섰다. 앞에서 한국 여자들이 걸어온다. 얼굴을 거의 아프가니스탄 여성 수준으로 가렸다. 햇빛 방지용일 것이다.

한국 여성들의 투철한 피부관리 정신에 탄복하는 사이 옆집 아저씨가 말한다. “오우! 아가씨! 안뇽하세요우? 차암 이뻐요우!” 앗차! 여성들 얼굴에 치한을 대하듯 도도한 표정이 떠오른다. 맹세코 나는 ‘안녕하세요’만 가르쳤지 ‘참 이뻐요’는 안 가르쳤다.

조깅이 끝나면 이 아저씨네 집에 들러서 커피를 한 잔씩 한다. 아까 그 문장을 좀 더 연습하게끔 종이에 써달란다. 미국인 와이프가 쯧쯧 하는 표정으로 내려와 커피를 만드는 사이, 나는 받아든 종이에 우선 한국말로 ‘안녕하세요’와 ‘당신 참 이쁘네요’를 쓴다.

내 손을 지켜보던 두 부부가 기절을 한다. “아니, 그렇게 어려운 부호를 어떻게 익혔니? 수많은 네모와 동그라미로 구성되어 있구나?” 나는 으흠! 하는 기분이 되어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야화를 드라마틱하게 엮어서 설명해 준다. 세종대왕이 말야… 하루는 해우소에 갔다가 말야, 거시기… 변비증세가 심했는지 하염없이 앉아서 창살 무늬를 바라보고 있던 중… .어쩌구 저쩌구… 두 부부의 존경심이 극에 달했을 무렵, 나는 흥이 나서 이번엔 한자를 쓰기 시작한다.

나의 이름은 金範洙, 너의 직업 변호사를 한자로 표기하면 辯護士, 로스앤젤레스를 한자로 쓰면 羅城…. 한자의 획을 그을 때마다 두 사람은 거의 신을 모시듯 넋을 잃고 나를 바라본다.

모닝 커피와 함께 내놓은 과일과 생크림 얹은 와플, 블루베리와 견과류 종류를 내가 젓가락으로 먹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엊그제 투고 박스에서 나온 나무 젓가락을 내놓았다. 묘기 대행진이 펼쳐지는 동안 나는 한국민의 타고난 손재주와 비상한 두뇌, 국제 경쟁력에 대해 뽐내며 일장연설을 했다.

이 얘기를 이튿날 오피스에 가서 했더니 나이 어린 간호사들이 “오모모, 선생님, 외국인 떡실신이네요!” 하고 웃는다.

셀폰 시장, 반도체, 가전제품, 최근의 자동차… 한국인들의 바쁜 머리와 손이 이룩해 갈 신화는 한도 끝도 없다. 21세기 국제시장의 죽고 죽이는 용호상박 전장에서 하늘의 뜻, 윤리를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범수 /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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