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복음 이야기 - 남과 여, 그 또렷한 신비

2010-02-10 (수)
크게 작게
“이 세상이 변한다 해도 나의 사랑 그대와 영원히….”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함께 관람한 가수 이문세의 콘서트에는 어쿠스틱 기타와 아코디언, 하모니카와 피아노가 한데 어우러진 사랑노래가 가득했다. 추억이 깃든 부드러운 발라드풍 노래들로 우리 부부의 감성지수는 한껏 윤기를 더했다. ‘하나님’ ‘복음’이란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나는 하나님을 느꼈다. 대중음악이든 클래식이든 사랑으로 인해 예술의 테마는 무한하고 또 위대하다.

어디 음악만이랴.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시나 소설, 영화나 드라마의 고정 레퍼터리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결혼으로 절정에 이를 때 생명이 잉태된다. 그 생명은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사랑을 안다. 나이가 차면 다시 결혼으로 생명 잉태의 사이클을 반복한다.

“신조차도 권태는 이길 수 없어 세상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무신론 철학자 니체가 퍼뜨린 오해다. 신은 단 한 순간도 심심하신 적이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서로간에 영광과 기쁨이 충만하셨다. 성자 하나님이 이 사실을 증언하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꼭 빼닮은 사랑의 공동체 여럿 만들기’, 이것이 세상의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시고 실행에 옮기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첫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사랑 대신 미움과 시기, 다툼과 전쟁이 끼어들었다.

한때 나는 왜 세상에 남자와 여자만 있는지 궁금했다. 왜 ‘여남자’나 ‘남여자’라 부를 만한 제3의 성은 없는가. 정교한 남성과 여성의 신체 차이를 우연의 산물로 돌린다면 결혼의 신성한 가치마저 고유의 제자리를 잃고 만다. 남자나 여자를 볼 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의 눈부신 ‘창조’가 곧바로 눈에 띄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태초에 하나님은 한 개인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나님 역시 한 개체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자 한 하나님이시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로 사랑이 완전무결한 존재이시다. 하나님 안에는 사랑의 충만함이 있는데, 그것은 한 개체 안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은 인간 각자 안에서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서로 결합된 남자와 여자에게서 드러난다. 그래서 부부관계의 친밀함은 삼위일체 하나님 서로간의 친밀함을 그대로 반영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의 세 파트로 구성된 가족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를 상징한다. 제 자식 한없이 예뻐하는 부모의 마음, 아이를 품에 꼬옥 안을 때 느끼는 따사롭고 포근한 기쁨,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당신이 사랑을 먹고사는 남자나 여자라는 것은 ‘종교적인’ 사실이 아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신이 육체를 입고 인류역사 속에 한 번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한 특정 종교의 창시자로 머물 수 없다. 그분을 영원 전부터 세상의 테마를 친히 기획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정말 생전 처음 대하듯 아주 낯설게 ‘발굴’하지 못한다면, 수많은 사랑노래들의 신비 또한 끝내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안환균 / 사랑의교회 목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