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 나는 아직 죽지 못했다

2010-02-0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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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죽지 못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바예호(페루1892-1936)의 시구처럼 나는 너무 조금 밖에 죽지 못했는지 모른다.

면목 없는 일이다. 이거 뭐 팔푼이지. 누구는 죽는 데 꼭 석삼년 걸렸다고 감격하고, 누구는 잘 익은 석류가 어느 틈에 문득 쪼개지듯이, 싱겁게 죽어지더라고 하는데. 그런대로 다들 잘도 죽는데. 크게 한 번 죽어야 무궁하고 무진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붓다의 금언을 받들어, 크게 한 번 죽으려고 죽자고 30여년을 죽어마지 않았지만, 이 변변치 못한 나는 여태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사바의 늪 속에서 한가로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근기 허약한 나로서는 금생에 해탈의 복덕을 누리고자했던 그 턱없는 열망을 접고, 부득이 다음 생을 기약해야할 것 같다.

아무튼 근간에 세풍이 메마르고 거친 탓인지 부쩍, 행복론이니, 행복 방정식이니, 행복 바이러스니 하면서 행복과 관련된 말들이 세인들의 입에서 붐비고 있다.

그러나 그 말들의 대부분은 행복을 단순히 욕망과 그 욕망의 충족이나 소유의 관계로만 설명하고 있다. 예로, 경제학자 폴 새무얼이 제시한 행복공식에 따르면, 내가 가진 욕망이 100인데 가진 것이 20이라면 내 행복의 값은 20이 된다. 하지만 내 욕망이 20이고 가진 것도 20이라면 내 행복의 값은 100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욕망은 욕망을 욕망한다는 골치 아픈 욕망의 항구적 속성이다. 거기에는 채워도, 채워도 언제나 모자라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과 현실과의 영원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다함없는 욕망은 분명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차이’가 주는 고통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항상 뒤따르게 된다. 또한 나의 욕망공간의 확장의지가 동일한 타인의 의지와 충돌함으로써, 또 다른 고통을 야기 시킨다.

그렇다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고통을 주는 욕망은 억제하거나 소멸시켜야 할 악덕일까. 아니다. 불교는 욕망의 억제나 소멸 의지도 또한 욕망이며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딜레마다.

통상, 욕망은 이기적 자기중심 의식의 발현이다. 때문에 그러한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교적 해법은, 욕망의 에너지를 이타적 원력과 선행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타심은 욕망의 주체인 ‘나’의 무상성과 허구성 그리고 나란 너와의 관계 속에서만 나일 수밖에 없으며, 너는 또 다른 나임을 자각하고 확신하는데서 드러난다.

결국 불교수행은 그 견고하고 이기적인 ‘나’가 끝없이 죽는 연습이라고 해도 되겠다.


‘나’가 꼼지락거리는 한 세상과의 화해는 없다. 내가 죽는 고통이 나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행복인 절대평온을 가져다준다는 역설이 붓다의 천명이다. 절대평온은 해탈이고 열반이며, 세상 어느 때, 어떤 경계와 부딪쳐서도 흔들림 없는 ‘한가로움’이다.

그러나 아득한 일이다. 아마, 인류사에 온전히 죽어 완성된 자는 샤카무니 붓다 한 분뿐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삼가 그 거역할 수 없는 불역의 천명을 믿고 죽어야 한다.

그지없는 ‘한가로움’이 그곳에 있기에.


박재욱 /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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