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눔의 행복 - Be in Other’s Shoes

2009-10-0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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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눈물이 많아서 “남자아이가 저렇게 여려서야…”라는 어른들의 걱정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다른 아이들과 좀 달라서, 무섭거나 두려울 때가 아닌 슬프거나 감동적인 상황을 접할 때, 또는 부끄럽거나 어색한 상황을 당할 때였습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삐져나와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른이 된 후에는 좀 뻔뻔해져서 부끄럽거나 어색할 때 눈물을 흘리는 적이 없지만, 아직도 슬플 때, 특히 감동적인 영화나 이야기를 접할 때에는 여지없이 ‘눈물의 대왕마마(?)’-둘째아이가 나를 놀리는 호칭-가 되어 딸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합니다.

최근 다시 한번 눈물의 대왕이 되고야 만 일이 있었는데,1 책 한권을 눈물을 흘리면서 읽다가 둘째 딸에게 들키고야 만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We Married Koreans’라는 제목의, 1960년대에 한국인 남편들과 결혼한 12명의 노년의 미국인 아내들이 50여년의 결혼생활을 기술한 책이었습니다. 미국인 남편과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안 아내 커플은 자주 접하지만, 그 반대의 조합은 흔치 않은 경우이며, 더군다나 그분들이 결혼할 당시에는 미국도 굉장히 폐쇄적인 사회였을 텐데 어떻게 그 분들이 부부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구입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는 동안 반세기 동안 계속돼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인 그 분들의 사랑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과 남편의 성장배경. 처음 만난 장소, 사랑하게 된 동기, 부모 등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장애물. 결혼 후 발생한 도전과 극복의 과정 등을 기본 골격으로, 10~20쪽씩 나레이션 형식으로 진솔하게 그들의 스토리를 담아낸 책이었습니다.


12커플이 만난 장소, 시간, 인연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분들이 겪은 50여년의 삶은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 분들이 한국인 남편을 만나 사랑할 당시만 해도 미국 내 많은 주에서는 타인종과의 결혼이 법으로 금지되었을 정도로 인종편견이 강한 시절이었고, 남편의 조국인 한국은 전쟁을 치른지 얼마 안 된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더욱이 언어적, 문화적 차이에서 야기될 갈등을 생각하면, 그분들의 결혼 결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부모의 축복 없이 단 둘이 결혼식을 올려야했던 이야기, 60년대 가난한 한국에서 신혼생활을 했던 이야기, 자녀들과 수퍼마켓에 가면 당연히 입양아로 여기던 사람들의 시선, 식생활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그러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터득한 그 분들의 지혜, 슬기로움, 인내, 그리고 사랑…. 어떤 영화나 소설도 전할 수 없는 진정한 감동과 교훈이 그분들의 반평생에 깊게 배어 있음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기꺼이 ‘눈물의 대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미국인 아내 12분이 터득한 ‘결혼생활 성공의 비결’이 너무나 똑같았다는 것이었습니다. ‘Be in other’s shoes!’ 즉, ‘입장 바꾸기’였습니다. 결혼 속에 존재하는 기본적 문제에 더해, 다른 인종과 언어, 문화, 주변의 편견이라는 큰 숙제까지 안고 시작한 그들의 결혼이 50년간 견고했던 이유는 바로 ‘기꺼이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지난 25년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니, 같은 민족, 문화, 언어, 생활환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못살겠다고 악다구니하고, 때로는 깊은 상처를 남기는 우리의 결혼 생활이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오늘 저녁은 내가 준비한다”고 선포하고 부엌에서 설치는 저를 신기한 듯 쳐다보던 집사람이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슬그머니 던졌습니다. “당신, 뭐 사고 쳤지!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솔직히 말해 봐.”

박준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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