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모르고….” 저녁나절, 어린 딸아이랑 집 근처를 산책하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다. 자전거를 타더라도 아빠랑 같이 가자고, 너 재밌자고 너무 빨리 앞서 달리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뾰로통해서는 잠시 천천히 가는 척하다가 이내 속도를 내는 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던진 하소연이다. “부모 마음을 자식이 어찌 알랴!” 어르신들의 말이 가슴에 짠한 여운을 남겼다.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도 비슷하실 것 같다.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고 인격적으로 대등한 사랑을 나누시려고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러나 제 뜻대로 등을 돌리고는 하나님을 떠났다. 나는 나를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의 마지못한 사랑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도 로봇을 원치 않으셨다. 당신이 지금 하나님을 거부한 채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도 모두 그분의 극진한 사랑 때문이다.
나는 딸의 말씨와 표정, 코믹한 포즈 하나하나를 사랑한다. 자식이라고 딸 하나밖에 없는데도 자녀의 복이 분에 넘친다. “So precious!”라고 실없는 사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딸아이 하나로도 내 인생은 충분히 살 만하다 싶기도 하다.
이 경이로운 사랑의 ‘실물’을 눈앞에 빤히 보고서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을까. 자신의 형상을 그대로 빼닮은 자녀를 둔 부모라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이미 잘 안다. 그 자녀를 부모 자신이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정자와 난자의 결합만으로 어찌 뼈와 살과 손톱과 머리카락이 조성되는가. 자녀가 기형아로 나면 하나님을 원망한다. 정상아로 나면 아예 하나님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한다. 얼마나 큰 아이러니요 불경인가.
딸이 갓난아기일 적부터 나는 딸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앞에 어른거리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릴 때는 어려서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자식이 다 자라서도 부모를 몰라본다면 어떨까. 창조주 하나님을 애매하고 추상적인 ‘신’이란 용어로 적당히 얼버무린다. 제대로 만나보려 하지도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간다. 대다수 인류의 무심한 모습이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각자가 ‘하나’인 존재다. 처음부터 그분과 인격적인 일대일 관계를 맺도록 지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세상에서 나 하나만 보신다. 그분께는 내가 전부다. 온 우주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내가 있어야 세상도 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가진 것만으로도 무한히 귀하게 보신다. 당신의 가치는 세상사람들이 아니라 창조자가 당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다. 세태는 철저히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다. 천하의 인기를 누리던 정치가나 연예인도 시원찮아지면 금세 대중들이 외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르다. 우리 각자는 도매금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얼굴이 저마다 뜻 없이 그냥 다른 게 아니다. 한뜸 한뜸 그분의 손길이 닿은 유일한 ‘작품’이다. 딸자식을 두면서 ‘아무리 못나도 내 자식이 최고!’라는 말의 속뜻을 어줍잖이 깨치고 나서부터 더욱 실감하는 진리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안환균
<남가주사랑의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