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 고통을 고통하라

2009-07-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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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무상하다. 그런가. 무상은 단절인가. 그래서 체념해야 하는 것, 오롯이 허망일 뿐인가.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길 없는 길, 나선 걸음 ‘아침마다 우짖던 산 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시인의 고독은 이 허허로운 상실과 단절의 공간 속으로 아득하고 무겁게 젖어든다. 산은 산인 그대로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이 막다른 허무 속에서 시인은(오세영) 그만, ‘자연’이 된다.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그래,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고, 그의 ‘겨울 노래’를 속세를 벗어던진 출리의 달관으로 갈무리한다.


무상은 모든 사물과 정신현상들의 보편적인 본질로써,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의미이다. 붓다께서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진리일 뿐이라고 하셨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00년)도 역시 ‘만물은 유전한다.’ 그리고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했다.

무상은 원인과 결과 간의 중단 없는 상호작용인 변화의 과정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흐름’일 뿐이며, 따라서 불교는 세상 어떠한 것에도 영원히 지속되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독특한 무아사상을 표방하게 된다.

그 변화라는 흐름은 소멸과 동시에, 그것을 통한 새로운 무엇이 끝없이 생성, 발현되는 역동적 과정으로, 변화는 생성의 질료이며 ‘되어짐’의 동력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무상이 지닌 소멸과 생성의 메커니즘에 무지한 채, 무상을 변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 영원하리라 믿었던 것들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변하고야마는 데서, 절망과 고통을 느낀다. 따라서 세상을 굴절된 시각으로 허무한 것으로만 왜곡하게 된다.

붓다의 교의가 지향하는 으뜸가는 ‘지고의 선’은, 인간들이 지닌 그러한 고통의 소멸에 있다.

물론, 고통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언제고 ‘이 또한 지나가고야 말 것들’의 속성에 대한 무지, 그리고 그로 인한 무모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결국, 고통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얻게 되는 불만족으로 마음의 균형이 깨어진 상태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타자화, 객관화시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붓다께서는 ‘관조’라는 수행 장치를 통해, 깨어진 마음의 균형을 회복하는 ‘회복의 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해탈의 길’을 몸소 증득하여, 무상에서 느끼는 고통을 평정의 세계로 전환시킴으로써 위대한 종교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관조의 불교적 의미는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불변의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관조를 통해 고통 속에서 고통과 하나 되어, 무상이 지닌 긍정적인 생명의 에너지는 물론, 바로 그 ‘고통’이란 자체도 무상한 것임을 자각하게 되면, 결국 해탈의 세계인 마음의 절대평정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주문하셨다.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니. 부디, 죽기 전에 죽지 말고 ‘고통을 고통 하라!’


박재욱(관음사 상임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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