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복음 이야기 - ‘한 시간짜리’ 1억달러

2009-06-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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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사디나 뒷산을 오를 때다. 산길 옆으로 늘어선 키 작은 들꽃들이 눈에 띄었다. 바람에 잔잔히 흔들리는 자태가 너무 곱다.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고 무리하게 고개를 치켜들지도, 나 좀 봐달라고 은근한 눈빛을 건네지도 않는다. 인적 드문 산속, 조용히 피었다 지는 들꽃들의 말 없는 무수한 말. 문득 성경 속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

들꽃도 사람도 땅에 발 딛고 살기는 똑같다. 다들 지고 나면 한줌 흙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1억달러를 한 시간 동안만 준다고 해보라. 그 돈으로 온갖 호사를 다 부린다 해도 잠깐뿐이다. 잘 사나 못 사나 영원에 비춰보면 다 눈 깜짝할 사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을 주셨다. 그래서 영원한 것만이 진짜다. 세상에 존재하는 억울한 고난과 불공평도 영원하지 않다. 이 문제를 빌미로 ‘선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부재’를 주장하기란 너무 성급하다. 하나님은 만인에게 공평한 죽음을 통해 부지런히 말씀하신다. 살아 있는 동안 너무 늦기 전에 영원한 가치를 붙잡으라고.


많은 종교들이 죄악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에 이르고자 애썼다. 불교에서 악과 고통은 처음부터 영원히 되풀이된다. 그 윤회의 사슬을 끊고 열반에 드는 것이 구원이다. 힌두교는 악과 고난을 업의 법칙, 곧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브라만, 크샤트리아 같은 각 계급에 부과된 규칙과 제의를 잘 준수하는 데서 구원의 길을 모색한다. 이슬람교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인간의 공로를 통해 구원에 이르려 한다.

그러나 불교는 무신론, 힌두교는 다신론, 이슬람교는 단일신론(알라)이다. 이들 종교는 성경에 나오는 창조의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다.

철학은 어떤가. “인간의 기원, 성장, 희망과 두려움, 사랑과 믿음은 우연한 원자 배열의 결과일 뿐이다.” 대표적인 무신론자 버트란드 러셀의 말이다. 그는 인간의 기초를 ‘끊임없는 절망’으로 본다.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결정적인 죽음의 타격을 입기 전에 인간의 보잘것없는 날들을 고결하게 해줄 고상한 생각을 잠시 간직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인생이 이토록 허무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비싸다. 사람의 생존을 위한 지구 환경의 ‘전천후 설비’는 꽤 쓸 만하다. 어쩌면 지구를 중도하차하는 사람들은 ‘세상 산 값’을 물어야 한다. 수의에 포켓이 없는 건 승차비 대신 두 손이라도 깨끗이 털고 가라는 뜻이 아닐까. 세상이 처음 디자인될 때 사람들의 죽음은 고려되지 않았다. 중도에 무언가 예상치 않은 탈이 났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고 표현한다. 공교롭게도 이 말의 기원은 하나님의 책 성경에만 나온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이 영적인 죽음과 함께 육체의 죽음도 동시에 선고되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죽음은 죄의 결과다. 인간이 만든 윤리 도덕이나 철학, 종교는 죄의 현상들만 갖고 해결책을 찾는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뿌리,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들춰낸다. 이 문제에 ‘우연’을 세상의 창조자로 믿는 사람에게는 ‘인격적인’ 해답이 없다. 우연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 기약 없는 침묵뿐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안환균 <남가주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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