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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칼럼/ 르네상스맨, 레오나르도 다 빈치

2009-05-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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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삼(소유디자인그룹 대표)

성당건축은 비잔틴, 로마네스크를 거치는 중세 시대와 그 이후 고딕 시대를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였다. 현 지구상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산물들인 자동차, 의류, 신발, 식품 사업 등 다방면에서 탁월한 디자인 재능을 뽐내는 나라들 중 필자는 이탈리아를 상위에 꼽지 않을 수 없다.인간의 개성 창출과 종합예술을 꽃 피운 르네상스 시대, 그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이것은 중세 시대의 막을 내리고 새 시대 창출을 내세웠다.

이 시대에 빼 놓을 수 없는 사람,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의 표본이면서 ‘천재 예술가’의 표본이기도 한 사람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의 예언가처럼 이 시대 이후의 예술과 과학의 방향을 제시했다.레오나르도가 관심을 기울인 분야의 방대함이나 심오함은 그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정신력과 인격은 우리에게 초인적으로 보이며 한 인간으로서 보기에는 너무도 신비하고 외경스럽다. 레오나르도의 노트와 스케치들은 식물학, 지질학, 동물학, 수리학, 군사학, 해부학 여기에 역학, 투시도, 빛, 광학, 색채 등을 포함한 물리과학의 여러 측면까지 다루고 있다. 그는 또한 생리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다만 변화하는 이미지들을 통해서만 현실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사람의 눈이 가장 중요한 기관이며 시각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는 플로렌스에서 태어나 베로키오의 스튜디오에서 교육을 받았다. 현실 사회의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 예를 그 옛날 레오나르도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그는 1481 년에 플로렌스를 떠나서 밀라노 공의 조직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기존의 신 플라톤주의가 경험주의적이고 현실적인 레오나르도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만약 그가 그 자리에 눌러 않아 있었더라면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레오나르도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
다.

새 직장을 잡기 위해 그는 고용주인 밀라노 공에게 다음과 같이 자기 자신을 소개했다고 전해진다. “간단히 말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에 대해 저는 공격과 방어의 여러 가지 무궁무진한 수단을 생각해낼 수 있습니다. 평화 시에도 저는 공공건물이든 사적인 건물이든 간에 건축과 건물구성에 있어 어느 누구보다도 완벽한 만족을 드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물길을 끌어올 수도 있습니다. 저는 대리석, 청동, 진흙 등으로 조각을 할 수도 있으며, 무엇을 그리던 다른 사람만큼 잘 그릴 수 있습니다.”수많은 건축적 스케치를 남긴 그는 서출 출신 이었기에 그 당시의 관습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기하학적 관계와 자연 발생이라는 두 가지 법칙을 항상 중시해온 그는 중앙집중식 평면 구조를 가장 즐겨 사용하였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면서 가장 신성시 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눈이었다.
레오나르도에게 있어서는 그가 “영혼의 창”이라고 부른 눈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 것은 없었다. 르네상스시대를 마감함에 앞서 또 한사람을 빼 놓을 수는 없다.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그다. ‘영감받은 천재’ 인 그는 다비드상으로 우리에게 조각가로서 친숙하지 않을까 싶다. 자기의 결점 뿐 아니라 남의 결점도 용납하지 않았던 그는 레오나르도의 무신론과는 대조적으로 열렬한 믿음이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자연의 신비에 빠져있었던 것과 반대로 미켈란젤로는 신을 탐구했으며 신의 숭고한 목적이 인간형체의 아름다움 속에 표현되고 있다고 보았다.풍부한 표현력, 보기 드문 감수성으로 모든 표현의 기준은 자기 자신의 판단에 의한다는 최초의 근대적 인간형을 제시한 그는,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를 능가하지 못했던 단 한가지의 예술인 시를 평생의 사색 수단으로 사용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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