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배수의 진과 성공에 대한 갈망

2009-02-0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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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을 시작할 때의 심정을 적어보고 시작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은 불경기라고 하지만 불경기는 다시 말하면 호경기의 시작이다.

광고에 모든 것을 걸었을 때 나는 배수의 진을 쳤다. 최악의 경우, 내가 일등을 했던 청소업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적탄을 맞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이 판에 거의 올인을 한 셈이었다. 걱정이 없을 수가 없었다.


걱정을 없애는 법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건 만큼 내가 할 일은 많았다. 신문 광고 문구를 챙기고, 리스팅 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손님들에게 편지를 쓰고, 서명해야 할 서류들을 정리하고… 청소 일을 할 때는 아침 6시15분에 시작했는데, 여기서는 그보다 15분이 빠른 6시에 나가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은 부동산 라이선스를 따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있다. 부동산용 계산기와 컴퓨터, 그리고 전지가위와 모종삽, 낫 등이 들어 있는 가드닝 도구 세트를 구입한 일이었다. 부동산용 계산기는 집을 사는 사람에게 이자율, 대출금 월 상환액수 등을 자동으로 계산해 주는 특수 장비로 부동산중개업자라면 누구나 구입해야 했지만 아무도 그런 장비를 구입한 사람은 없었다. 월에 얼마 정도씩 지불하는지를 알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에 고가품이었던 컴퓨터를 구입한 것은 새내기다운 이색적인 결정이었다. 부동산업계에서 프로가 되려면 정보의 취득은 물론 그것의 과학적인 분석과 종합을 통한 통계 작업에서 일반인들보다 앞서가야 했다. 비싼 사무기기라 하더라도 그런 이유에서 컴퓨터는 필요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출발점에서부터 한발 앞선 에이전트로 차별화가 됐다. 그때 대다수 한인 부동산 종사자들은 복덕방 수준을 넘지 못한 채 수기나 암산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가드닝 세트를 구입한 것은 얼른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청소를 포함하여 페인트, 타일, 마룻바닥, 정원 등 집이나 빌딩 관리 일체를 주업으로 한 메인테넌스업에 종사했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아하!’ 하고 이해가 될 것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그것은 나에게 정말 소중하고 대단한 이점이었다.

가드닝 세트는 ‘오픈 하우스’용으로 쓰는 도구였다. 오픈 하우스란 손님으로부터 매각을 의뢰(리스팅)받은 집을 다른 부동산 에이전트들이나 구매 의사가 있는 떠돌이 개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주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을 말한다.

오픈 하우스 행사 날이 되면 에이전트들은 아침 시간을 오픈 하우스 표지판을 붙이는 데 할애하고 오전 11시께 부터 본격적으로 집 구경을 오는 손님을 받는다. 이때 에이전트의 태도는 의뢰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오픈 하우스 표지판을 단 하나라도 더 부착하려고 애를 쓰고 손님에게 성실히 설명하는 것은 단돈 1달러라도 더 받을 수 있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의뢰인에게도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래야 집을 판 뒤에도 뒷말이 없고 흡족하게 생각한다.

첫 거래는 그 해 12월16일 시작해서 12월23일에 이루어졌다. 남문기 스타일의 오픈 하우스 기법을 찾은 것은 특히 의미가 컸다. 그때부터 나는 에이전트들이 이제까지 해온 방식과는 다른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일이 몰려왔다. 광고의 효과가 그렇게 컸다. 첫 거래는 망쳤으나 1월 성적을 결산해 보니 내가 소속된 오피스 안에서 1등이었다. 2월에도 일등을 했다. 3월에는 가든그로브내의 한인타운 한인이 운영하는 부동산회사로 옮겼는데, 거기서도 소속 20여명의 에이전트 중에서 내가 일등이었다. 총 8개를 팔면 내가 7개를 팔고, 10개를 팔면 내가 9개를 팔았다. 새내기 에이전트였으나 어느 사이 오피스의 핵심이 되는 에이전트로 인정받았다.


이런 지나친 독주는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양극화로 인한 심리적 박탈감이 시기와 뒷말을 낳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부동산업계는 실적으로 말하는 세계였다. 지금도 여느 오피스처럼 보통은 일등이 해당 오피스를 먹여 살리는 것이니까.

나는 그래서 한 오피스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부동산에 간 지 3개월 만인 6월 하순에 ‘ERA 그로브 리얼티’ 오피스로 자리를 옮겼다. 22명이 일했던 ERA에는 한인, 미국인, 베트남인, 히스패닉 등 여러 인종이 섞여 있었으며 거기서도 10개를 팔면 내가 9개를 팔았다. 많을 때에는 나 혼자 한 달에 28개를 팔기도 했다. 물론 건축업자가 지은 한덩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주택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피스를 옮길 때 에스크로를 28개나 가지고 옮긴 적도 있었다.

결국, 그런 여세를 몰아 9월25일에는 오렌지카운티 가든그로브, LA 한인타운과는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뉴스타부동산’ 간판을 단 내 소유(오너)의 부동산 오피스를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뉴스타부동산이 미국 프랜차이즈 ‘리얼티-월드’남가주 일등이라는 최고 실적을 기록하여 부동산 업계를 바짝 긴장시키기도 했으며 최고의 상도 받았다. 입문 첫해에 한 마디로 신인왕과 시즌 MVP를 동시에 석권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언제부터 남문기가 유명했는지 물으면 나는 ‘시인 바이런’을 이야기한다. 1988년 어느 날 보니 가든그로브에서 아니 남가주에서 남문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이다. 신문광고, 벤치광고, 버스정류장의 대형광고, 판촉물을 통한 광고 등으로 알려져서 한인들 중 상당수가 일면식도 없으면서 내게 인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것이 광고 효과였다. 지금도 당신을 성공시키는 것은 회사 브랜드와 광고라는 것이다. 가문과 개인의 능력이 합쳐지면 투자승수 효과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남문기, <뉴스타 부동산 대표> (213)999-4989
www.newstarrealty.com , ceo@newstarreal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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