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마의 일기- 승욱이 이야기

2008-09-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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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엄마와 거북이 아들의 경주

한동안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쫓아다니는 일로 승욱이에게 많이 소홀했다. 승욱이는 집에 오는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난 ‘왜 이리 자주 토요일이 돌아오는 거야?’ 일단 승욱이가 집에 오면 일이 몇 배로 많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심장수술을 했는지 알 바 없는 승욱이는 반갑다고 할머니에게 마구 달려드니 엄마가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엄마가 층계를 오를 수 없기에 거실에다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계시니 승욱이는 ‘이게 웬 점프용 매트리스인가?’ 매트리스 위에서 콩콩 뛰어대는 통에 승욱이가 집에 오면 다들 비상이다.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 기침도 제대로 못하는 엄마는 승욱이의 모습이 귀여운지 놀게 놓아두라고 하지만 난 불안해서 자꾸 소리를 지르고 있다. “승욱아~~ 조심해! 좀 얌전히 앉아서 놀아~~” 엄마의 괴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에 오면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며 휘젓고 다닌다.


어영부영 날짜를 보니 승욱이의 아홉 살 생일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5세 때 생일잔치를 거하게 한번 해주고 매해 그냥저냥 넘어가고 있다. 승욱이가 5세 이후 해마다 승욱이의 생일 즈음에는 꼭 집에 일이 생기니 알고도 넘어가고 모르고도 넘어간다. 나머지 세 아이는 생일 몇 달 전부터 생일파티 어떻게 해 줄 거냐고 거의 협박하다시피 따져 묻는데 승욱이는 자기 생일인지도 모르고 있다.

지난 9년을 돌아보니 승욱이의 성장과정을 깨닫게 되었다. 과연 이 아이가 크고 있는지조차 못 느끼게 너무 느리고 더디다 못해 속도 감각이 전혀 없는 아이 이승욱. 언제 크나. 어떻게 키우나를 고민하던 내가 무색할 정도로 아이는 외형적으로는 너무 반듯하게 잘 자라주었다. 언제나 자기 의사가 분명하고, 자기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수화로 자신과 대화가 가능한 사람과 아닌 사람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고, 기숙사를 가는 것과 집으로 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좋아하는 음식이 분명하고, 가족을 너무 잘 알아보고, 좋아하는 음악에 율동을 하며, 언제나 행복한 웃음을 우리에게 주는 아이로 컸다.

여전히 승욱이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고, 말을 못하고, 또 와우이식을 한 것으로 조금 들을 뿐이다. 와우이식한 것의 스위치를 끄면 전혀 듣지 못하는 아이가 이만큼 자라주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견하지 모른다. 정상아와 비교하면 못하는 것 투성이지만 난 가끔 나의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말을 하지 않는 상태로 10분, 20분을 지낼 때가 있다. 얼마나 답답한지 미칠 것 같이 답답한 상황의 승욱이를 이해하고 또 그 입장이 되어 보려 한다. 내가 승욱이라면 승욱이 만큼 자라지 못했을 것 같다.

하루도 쉬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발을 내딛으며 걷는 아이가 어느 땐 너무 답답해 보이지만 거북이의 걷는 보폭이 원래 짧듯 승욱이의 걷는 보폭도 짧은 것이다. 승욱이의 눈높이에서는 지금 너무 잘 걷고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쉬지 않고 꾸준히 말이다.

그런데 거북이 아들을 둔 그 엄마는 어떤가, 언제나 애를 태우며 저만치 앞서 나가 아들이 빨리 달려오기를 기다리며 때로는 안타까워하며 때로는 실망하며, 때로는 기대하며, 때로는 낙망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장애 아들이 내가 이리 애를 태운다고 하루아침에 정상이 되는 것도 아닌데 토끼의 보폭이 원래 길듯 나의 걷는 보폭이 너무 넓고 길기에 거북이 아들의 걸음을 못 기다려 주고 참지 못할 때도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난 언제나 큰 소망이 있다. 토끼 엄마와 거북이 아들의 경주에서 분명 거북이 아들이 승리할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승욱이는 실망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쉬지 않고 걷기에, 남과 비교하지 않기에, 주변을 신경 쓰지 않기에, 그리고 언제나 밝게 웃기에 말이다. 지난 9년의 보이지 않았던 성장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또다시 9년 후에 시간을 돌아보면 더디지만 느리게 성장한 아이를 발견하게 되겠지? 생각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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