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왕자님?달을 따다 주세요”

2008-09-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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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달을 따다 주세요”

켈리 손씨는 그녀의 첫 단편 ‘달’(La Lune)로 샌디에고에서 개최된 최대 규모의 만화잔치 ‘2008 코믹-콘 국제 독립영화제’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왕자님?달을 따다 주세요”

9월20일과 21일 롱비치 라틴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에서 개최될 LA 국제 어린이 영화제와 10월12일 패사디나 키드스페이스 어린이 뮤지엄에서 상영될 단편 ‘달’(La Lune)의 캐릭터들과 포스터.

만화와 인생, 차이는 있어도 열정은 같단다. 밤새워 작업을 한 듯 빠알간 눈, 새침한 표정으로 나타난 그녀는 영락없는 토끼다. 소니 게임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는 남편이 그녀를 ‘허니’(Honey) 대신 ‘버니’(Bunny)라고 부르는 것도, 그녀가 사용하는 ‘블루토끼’(bluetokki)라는 아이디도 그녀를 만나보니 수긍이 간다. 달에서 방아를 찧는 토끼처럼 기발한 상상력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만화를 만들어낸 그녀다. 21세기를 바꾸는 키워드가 ‘상상력’이라고 하질 않는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 같은 만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고 있는 그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영화제와 어린이 영화제들이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단편 애니메이션 ‘달’(La Lune)을 만든 켈리 손(한국명 손경희)씨를 만났다.

애니메이터 켈리 손

국제영화제 단편 수상… 만화 ‘달’등 2편 완성
‘어린왕자’같은 애니메이션과 동화책 출판이 꿈


‘그네를 타다가 하늘을 바라보던 여자가 말한다. “달 따다 주세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선 못할 것이 없는 남자. 그녀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남자는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잭과 콩나무’를 떠올리며 나무에 정성껏 물을 준다. 쑥쑥 자라난 나무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간 여자는 달과 가까워지지만 손에 닿을 듯 멀어지는 달이 얄밉기만 하다…’

켈리 손씨가 만든 단편 ‘달’(La Lune)은 몽환적인 달빛을 머금은 3D 애니메이션이다. 한편에는 나비가 날아다니고, 다른 편에는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는 모래시계 세상을 통해 인생철학을 표출한 단편 만화영화로, 비디오 게임과 애니메이션 작곡가로 유명한 크리스 틸턴의 음악이 특히 마음에 와 닿는 감성 팬터지이다.

7분짜리 애니메이션 하나 완성했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물을 수 있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컨셉부터 스토리보드, 모델링, 랜더링, 편집까지 혼자서 완성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하루 종일 네모난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테크닉을 터득하고 예술성을 입히는 것이 얼마나 피를 말리는 작업인지. 스토리를 생각해 낸 시점은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결말을 찾지 못해 머리카락만 뜯다가 2년 전 번뜩이는 섬광을 붙잡아 드디어 해냈다.

“한국에서 화학과를 다니다가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어서 미국에 왔어요. 칼 아츠 캐릭터 애니메이션 학과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즐기다가 돈을 벌고 싶어서 게임회사 ‘미드웨이’(Midway)에 캐릭터 애니메이터로 입사했죠. 비디오 게임을 만들다보니 감정 표현보다 ‘액션’을 중요시되더라구요. 원래 하는 일에 충실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라 때려 부수고 피 터지게 싸우는 장면을 누구보다 잘 만들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늘 ‘어린왕자’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나 봐요.”

알고 보니 그녀는 과격한 격투신과 잔혹성,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른 게임 ‘모탈 컴뱃’(Mortal Kombat)을 만든 캐릭터 애니메이터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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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방아 찧는 토끼처럼

과격하고 잔혹한 격투신 게임‘모탈 컴뱃’만든 캐릭터 애니메이터 출신
칼 아츠 졸업… 신발 끈 물어뜯는 애완견 모습서 영감 ‘락시의 꿈’ 탄생

대전격투 게임을 만드는 것도 나름대로 보람을 느낄 수 있었지만, 늘 서정적인 애니메이션 작업을 갈구하는 그녀를 안타까워하던 ‘솔 메이트’ 남편의 배려로 칼 아츠에 돌아갔다.


2년 만에 두 편의 애니메이션을 완성하겠다는 각오였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기란 쉽진 않았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그녀 세대와 아이디어가 풍부한 게임 세대와는 만화에 대한 접근방식이 달랐다. 하지만, 그녀로는 상상도 못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어린(?) 학생들에게서 자극을 받는 순간이 그녀에겐 행복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은 역시 액팅이 중요하죠. 캐릭터들의 감정이 얼굴에 묻어나야 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작도 자연스러워야 하고. 그래서 첫 단편을 완성하는데 2년 가까이 소요됐어요. 지금 막 두 번째 단편을 끝냈는데 딱 3주 걸렸네요. 1년 전에 입양한 포메라이안 시바이누 믹스 강아지 ‘락시’ 덕분에 생각해낸 스토리인데 주위 사람들은 두 번째 작품을 더 좋아하네요.”

어느 날 강아지가 여섯 켤레의 신발을 자기 주위에 끌어다 놓은 모습을 발견했고 “왜 그랬을까” 궁금했다는 그녀. 그냥 신발 끈 물어뜯기를 좋아하는 강아지의 습관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지만 ‘강아지의 입장’에서도 변명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는 바람에 신발이 새가 되어 날아가는 애니메이션 ‘락시의 꿈’(Roxy’s Dream)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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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가만히 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강아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매 순간 어딘가로 사라지는 신발을 자세히 관찰한 덕분이었다.

애니메이션 2편을 완성하니 정말 칼 아츠를 졸업하게 됐다는 그녀는 요즘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2008년 칸 영화제 단편부문 진출을 비롯해 코믹콘 국제 독립영화제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 수상, 이집션 극장 주최 필 굿 영화제, 부다페스트 애니메이션 영화제, 2009년 뉴욕 어린이 영화제 초청 등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달’(La Lune)의 상영이 줄을 잇고 에이전시로부터 동화책 출판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니라서 초등학교 교사인 시어머니의 감수로 그림 동화 출판을 준비하고 있어요. 내년 쯤 출판 예정인데 정말 행운이죠. 사실 칼 아츠 재학 시절 한국에 영어강사로 나갔다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책 출판에 관여한 적이 있어요. 그 때부터 그림 동화책 출판이 꿈이었거든요.”

컴퓨터 앞에서 작업할 때를 제외하곤 부엌에서 요리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는 그녀의 취미는 머그컵 수집이다.

요즘은 애완견 락시의 장난기 때문에 깨어져 나가는 머그컵이 더 많지만 한창 때는 한쪽 벽면 가득 머그컵이 줄을 지었다고. ‘달’이란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했던 나비와 물고기가 사는 모래시계처럼 어쩌면 그녀는 이루고 싶은 꿈을 담을 예쁜 그릇이 필요해서 머그컵을 수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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