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눔의 행복- 소리없는 쓰나미

2008-06-17 (화)
크게 작게
며칠 전 마켓에 다녀 온 집사람이 호들갑을 떨면서 다가왔습니다.

“코스코에 쌀 사러 갔는데, 1인당 5봉지 밖에 안 팔더라. 쌀값이 작년 보다 거의 두배가 올랐는데, 더 오를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사재기를 하나봐. 그래서 구입 한도를 두었다나 봐. 원 이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실제로 미국 내 쌀값은 2008년 초에 비해서 68%가 올랐고, 밀가루, 옥수수 가격은 거의 100% 이상 상승했습니다. 가장 부유한 미국에서조차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굳이 통계를 찾지 않아도 세계의 식량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WFP(유엔 식량계획)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 국가 중 37개 국가가 식량부족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 중 21개 국가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하루에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입니다.

월드비전 식량배급 담당 부회장 월터 미들튼은 월드비전 직원들에게 보낸 긴급 서신에서 “월드비전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750만명의 수혜자들 중 무려 150만명이 식량배급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해있다”고 밝혔습니다. 후원금이 일정한 가운데, 가격 앙등으로 구매할 수 있는 곡물량이 현저히 줄었기 때문입니다. WFP 역시 자신들이 지원하는 식량배급의 수준을 작년과 동일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무려 7,000만달러의 추가 예산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식량위기의 원인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지속적인 인구 증가, 선진국 가정의 식단 변화, 에너지 위기를 대처하기 위한 ‘바이오 연료’ 개발을 위한 곡물 소비량 증가, 유가 상승에 따른 비료가격 및 유통비용 상승, 게다가 세계 인구의 3분의1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의 경제력 상승으로 인한 식량 수요 급증 등 다양한 원인이 있습니다.

지난 6월3~5일 로마에서는 40여개 국가의 정상들과 151개 국가 고위 관계자들이 모여 ‘유엔 식량안보 정상회의’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30년래 최악의 식량위기가 지구촌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면서 해결책을 시급히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회의에서 채택된 공동선언문을 보면 각국의 이해관계가 고려된 추상적인 메시지만 담겨있을 뿐, 기아와 사투를 벌여야 하는 절박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식량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궁극적 대책이 무엇인지 등은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은 저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단지 식량위기의 최우선 희생자가 될 그 수많은 사람들의 내일이 걱정이 될 뿐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에는 심각한 혼란이 옵니다. 국가가 붕괴되고, 약탈과 전쟁이 잇따르게 됩니다.

이제 해결의 길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조금씩 더 나누는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전 세계 월드비전 사업장에서 보내온 심각한 식량문제에 대한 메일을 열어보다가 괜스레 우울해져서 불쑥 저녁을 짓고 있는 집 사람에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밥 좀 조금씩 해라. 먹다가 남겨서 버리는 쌀이 아깝지도 않냐. 이제 쌀도 5봉지씩 밖에 못산다며…”

영문도 모르고 핀잔을 얻어 먹은 집 사람의 황당한 표정을 뒤로 하고 슬그머니 문 밖으로 산책을 나가는데 뒷머리가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박 준 서
(월드비전 아시아후원개발 부회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