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윤실 호루라기- 적 그리스도를 닮는 법

2008-04-0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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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곳 지방 신문의 기사내용이다. 명문 하버드대학에서 종교학 분야로 학위 받은 분이 종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불필요한 오해가 없도록 내용을 그대로 옮기겠다. “불교의 깨달음은 ‘절’(사찰)과는 관계가 없다고 본다.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도 현재의 교회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깨달음과 구원의 메시지는 어딘가에 있다.”

물론 모두에게 수긍이 가는 타당한 결론은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른 신앙인 불교의 깨달음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구원 메시지가 교회와 상관없다는, 기독교의 본질에 도전하는 쿠테타적 발언이 내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가 교회의 심오한 본질과 출발을 무시한 채 근거 없는 자신의 사상을 거침없이 표현했을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해 보지만 속이 차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사상이 끊임없이 도전하며 교회의 몰락을 시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교회는 어두움의 권세에 수없이 흔들려 왔다. 베드로라는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울 때 음부의 권세는 비웃는다. 그러나 베드로가 아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 위에 세워질 때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권위와 살아계신 예수님을 증거할 것이다.

현실은 우리에게 참 하나님의 교회가 되도록 허락할 만큼 자비롭지(?) 못하다. 권력과 돈과 명예를 업어야 한다는 유혹에 밀려온다. 교회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결국 ‘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해야 세상이 알아준다. 위장술이 속출하는 시대를 맞아 교회마저 척하는 모양과 가장하는 문화에 물들기 때문에 참 구원의 주춧돌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호되게 꾸중하셨다. 제사의 유일한 대상인 여호와를 배제한 채 자기 기쁨과 위로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제사에 하나님은 관심을 닫으셨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으로 성전 제사를 주장하는 그들을 향해 회 칠한 무덤이라 꾸짖으셨다. 그들의 종교 의식이 바로 ‘적(敵)그리스도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비판에서 안전한가?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의 꿈은 이미 깨어진지 오래다”고 했다. 많은 교회들은 이미 깨어져버린 꿈을 끼워 맞추려 한다. 예수께서 진노하시며 저주하신 성전 관리들이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이 가장하는 제도와 형태에 있어 닮지 않았을까! 온 몸에 퍼진 암을 쉽게 박멸하고 사람을 살릴 수 없는 것처럼, 교회의 타락 물결을 돌이킬 방법이 상실되었다. 무엇이 닮았다는 말인가? 지도자의 거짓과 불법을 교회가 마치 진리를 수호하는 전사처럼 앞장서서 변호하는 것이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은 부패한 성전을 고치고 새로 만들지 않으시고 포기하셨을까? 그 분은 종종 목적에 어긋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까지도 포기하셨다. 그리고 정말 새로운 것으로 대신하셨다. 예수님도 더러운 성전을 청소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지 않으셨다. 성전보다 나은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셨다. 거짓을 포장하는 교인들과 적그리스도로 가득하다면 그 교회를 포기하시고 참 메시지가 선포될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정직하게 선포되는 교회를 그분은 보고 싶어 하신다. 불의를 불의라 지적하지 못하는 교회는 적그리스도를 생산하는 온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손 경 호
(보스턴 성령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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