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

2008-03-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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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며, 교회의 표시다.
심지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건물에 십자가가 걸려 있으면 그곳이 교회임을 안다. 그래서 여행 중에도 교회를 쉽사리 찾아갈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십자가를 교회의 표시로 받아들일까.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될 수 있었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 때문이다. 그리스도 외에도 많은 죄수들이 예수님 우편과 좌편의 강도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했다. 그러나 강도나 반역자와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스스로 속죄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힌 분이셨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렇다 해도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지금처럼 그분을 기억하려고 교회 위에 십자가를 세워놓을까. 아니면, 그냥 죄 없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을까. 고려를 지키다 죽어간 정몽주나 단종 복위를 꿈꾸다 죽임을 당한 성삼문의 애석한 삶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바로 죽음과 싸워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판가름났다.
이 세상 그 어떤 위인도 지구상에 더 계셔야 한다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죄 없는 누명을 쓰고 죽었다가 누명이 벗겨져 다시 살아난 적이 있었느냔 말이다.
아침이 되면 밤은 간다.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듯 죄악은 선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원죄를 지닌 인간성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공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말씀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의 생명을 바친 십자가상의 피흘리심으로 인류의 원죄를 말끔히 씻어내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예수님만은 이처럼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죽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십자가는 그래서 사랑의 은총이다. 사랑하기에 스스로 짊어지는 ‘짐’이다. 엄마가 짊어지는 해산의 아픔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고통을 통해 생명을 잉태하는 사랑의 과정처럼 말이다. 십자가는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감히 질 수도, 견뎌낼 수도 없는 삶의 짐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외 없이 짊어지고 가야 할 저마다의 십자가가 있다.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는 삶의 십자가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지라고 하신다. 그것도 ‘기꺼이’ 지고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신다. 십자가를 지는 길이 당신을 사랑하는 길이라고까지 말씀하시니, 누가 회피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짊어지라고 하신 그 십자가가 과연 무엇일까. 얼른 쉽게 말해 각자의 삶에서 ‘하기 싫은’ 그 무엇 아닐까. 또는, 하고 싶은데 ‘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알고 보면 우리 인간의 삶 속에는 누구에게나 그런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십자가를 그 누가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지겠다고 나서려 하겠는가. 그렇기에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은총 없이 억지로 지고 가다가는 기진맥진해 쓰러져 버리거나, 지고 간다 해도 불평불만으로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죄인을 살려내시기 위해 영광의 하느님이 당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놓고 속죄의 제물까지 되어 주신 그 크신 사랑 앞에서 그저 펑펑 눈물 흐리면서 우리도 삶의 십자가를 지고 싶다. 그리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새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부활’의 의미가 아닐까.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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