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북극성

2008-02-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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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골 밤하늘은 찬란한 별들의 잔치였다.
영롱한 별들이 모래알처럼 반짝거리던 그 청명한 밤하늘이 그립다. 불과 반세기만에 그 많던 별들이 다 숨어버리고, 밤하늘에 겨우 몇 개씩 눈에 띄는 혼탁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영리해진 인간이 자초한 산업화의 후유증이다. 인간이 자연을 보살피지 않으니, 별들마저 신음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요즘은 최첨단 전자장비에 의존하여 배들이 바다를 항해하지만, 옛날에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항해했다. 그 당시 뱃사람들은 낮에는 나침반을 바라다보고, 밤에는 ‘북극성’을 쳐다보며 방향을 잡아 항해했다.
시간이 지남에 다라 별들의 위치도 달라져 가는데 오직 북극성만은 변함없이 언제나 제 위치를 지킨다. 그렇기에 칠흑 같이 어두운 밤중에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이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푯대가 바로 ‘북극성’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도 수시로 삶의 방향을 점검해 주는 ‘푯대’가 필요하다.
제멋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다보면 엉뚱한 곳으로 빠질 수 있는 것이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올바르게 산다고 큰소리치지만, 최소한 일 주일에 한 번 정도라도 삶의 방향을 점검해 줄 ‘푯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마지막 인생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교회’는 그래서 인생항로의 유일한 푯대다.
그런데도 요즘은 옛날에 비해 매주 교회에 꼬박꼬박 나오는 교인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가는 추세란다. 크리스천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멀어지는 저변의 이유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교회는 그 때문에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반드시 해야 한다.
슬픔과 절망이 있을 때 찾아가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고,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나눌 수 잇는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 되어야만 중간 푯대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닐까. 골프 칠 때 최종 목표인 그린 홀의 위치를 알려주는 중간 깃발처럼,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할 수 있도록 올바른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몫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0장17절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고 했다. 교회가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들려주는, 가르침이 함께 하는 ‘진리의 증언자’가 될 때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저절로 돌아서게 되지 않을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하고 고민할 때 교회는 그 해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신 것처럼,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존재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비로소 이 세상 어둔 인생항로에서 단 하나 믿고 의지할 ‘북극성’이 되지 않을까.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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