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예외가 없는 세상

2008-02-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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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이라는 불청객을 달고 다닌 지 꼬박 3주가 지났다.
해마다 감기를 거르지 않아 올해도 예방주사 맞는 가족에게 쓴소리 해가며 건강한 척 했던 자신이 머쓱해졌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쉽게 표현하는 버릇 탓인지 짧은 생각으로 툭 던져 놓곤 길지도 않은 시간에 부메랑처럼 되돌려 받아 차라리 침묵으로 일관하는 요즈음이다.
덕담은 오랜 시간 흘러도 탈이 없는데 타인에 대한 뒷소리는 잠시 우쭐할 새 없이 자신에게 바로 돌아오니 말을 조심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3주를 앓게 되면서 자연히 신문광고를 접은 것은 고객에게 좋은 매물을 소개해야 한다는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일념으로 그간 한번도 거르지 않은 광고를 접으면서 광고에 보이지 않으면 신용을 주지 않았던 본인의 모습이 겹쳐 온다.
누구나 다 이유가 있는 것을 내 잣대로 여기저기 재면서 잠시라도 우쭐했던 모습에 작아진다. 몇 해 전, 목회자가 주일마다 헌금 강요를 대놓고 한다는 동료의 푸념에 함께 어이없어 하다가 내가 다니는 교회는 그 흔한 자기 건물 없이 여기저기 빌려가며 예배 보는 본받을 만한 교회라고 하며 그녀의 발길을 붙잡았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해어마한 대지를 사들여 큰 성전을 짓는다는 계획과 함께 건축헌금 모으기에 동참하자는 설교에 어이없어지면서 빚진 것처럼 그녀에게 미안했던 기억이 떠올려진다. 그 때는 자신이 적을 둔 교회가 적어도 타 교회와는 분명 다르리라는 어리석은 편견과 성전의 규모에 따라 교회의 성공여부가 가려진다는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 후 처음 시작처럼 작더라도 비즈니스 성격을 띄지 않는 교회를 나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보내며 얻은 것은 내 안의 믿음만큼만 행하면 된다는 결론으로 크고 작은 비판을 접어버렸다.
‘네 탓’인지 ‘내 탓’인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집으로 주변사람과 크고 작은 갈등을 갖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며칠 전 만난 고객은 자기 아들은 학교와 집 밖에 모르는 모범생인데 친구 하나 잘 못 만나 수업도 빠지고 다닌다며 애꿎은 아들 친구만 입에 담고 있었다.
똑같이 자식 키우면서 누가 누구 탓을 할 수 있을까?
그 힘든 이민생활을 정말 자식 교육 때문에 왔는지 적응 못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의문이 부모들의 탄식에 묻혀 버린다. 내일을 알 수 없고 장담 할 수 없는 미래에 그저 지금처럼, 처음의 마음처럼 가정과 이웃을 감싸 안을 수는 없는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고 싶다. 세상 살면서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 해가 거듭 될수록 점점 없어지는 것을 보고는 한껏 목청이 낮아짐을 느낀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다만 남이 먼저 겪고 내가 나중에 겪게 되는 것뿐인 것을 자신만큼은 예외가 되는 줄 알고 미리 자만할 필요는 없다.
음력설을 맞아 새로 시작하는 맘으로 그저 말 먼저 앞서지 말고 남을 비판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부족함을 지켜봐 주는 아량을 가졌으면 한다.
지켜봐 주는 세월동안 그가 따스한 내 벗이, 이웃이 될 수 있다면 덜 외롭지 않을까?
마음의 독감을 앓고 난 지난 몇 주 동안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면역이 조금이나마 생긴 것에 감사를 느낀다.
(562)304-3993
카니 정
콜드웰뱅커 베스트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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