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눔의 행복-아빠! 그냥 ‘분부장’해라

2008-01-2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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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인 둘째 딸아이는 아빠인 저를 ‘월드비전 분부장’이라고 부릅니다.
아빠가 월드비전에 몸담고 있다는 것에 특별히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 아이에게 ‘분부장’은 아빠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호칭입니다. 그런데 왜 ‘분부장’이냐구요? 그 아이가 두살 되던 해, 제가 한국 월드비전에서 후원개발 본부장을 맡았는데 그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 직원들이 저를 부르는 호칭을 ‘분부장’으로 들은 모양입니다. 습관이 되어서인지 그 후 아무리 정정해 주어도 계속 ‘분부장’이라 부릅니다. 아주 어릴 때는 친구 아빠들은 한 번도 못 가본 동물의 왕국 아프리카를 수시로 다녀오는 아빠가 자랑스러웠는데, 어느 날 교회 강단에서 지치고 슬픈 아이들의 영상을 상영하며 “도와주세요”라고 호소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는 ‘분부장’이 뭐 하는 사람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고, 그 날부터 아빠는 그 아이의 진정한 히어로(hero)가 되었습니다.
4년 전 미국 월드비전으로 옮겨와 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간 지 반년쯤 지난 어느 날 그 아이의 담임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담임이라는 말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가슴에 덜컥했는데 “혜인이 아빠냐?, 오늘 처음으로 혜인이가 내게 영어로 얘기를 했다”는 축하 전화였습니다. 안도감 속에 아이가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하는데 선생님이 “그런데 혜인이가 한 이야기가 뭔지 아느냐? 뜬금없이 다가와서는 지구상에는 2초마다 1명, 하루에 3만5,000명의 아이들이 배가 고파 죽어가는 것을 아느냐고 물어보더라. 하도 이상해서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My Dad is World Vision’s 분부장’이라고 그랬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월드비전은 알겠는데 도대체 분부장은 뭐냐고 물어 왔습니다. 저는 웃으며 “분부장은 Director의 한국말이다”고 얘기해 주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마 말도 안 통하는 미국 땅에 와서 한동안 서러웠던 감정을 자기 딴에는 아빠 자랑으로 씻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해 말 저는 황감하게도 코리안을 포함한 미국 내 아시안 전체를 총괄하는 ‘부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신문에 기사가 나가면서 많은 분들이 축하 전화를 걸어 주셨습니다. 뭔가 아빠가 부산스럽다는 것을 눈치 챈 아이가 엄마로부터 그 이유를 듣고는,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아빠, 이제 부회장이라며? 나는 분부장이 더 좋은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어른 사회의 조직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운 그 아이는 아빠가 자신의 12년 평생 동안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그 일을 이제 그만 할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같은 일을 계속할 것이며, 오히려 더 바빠질 거다”라고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더니 얼굴빛이 순간 환해지는듯 하더니 그것도 잠시 뿐, 잠자러 간다며 이층으로 올라가던 아이가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아빠! 그래도 그냥 분부장해라”
그때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분부장’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그런 직책의 개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작은 가슴 한구석에 언제나 남아있는, 자기 또래의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것, 그 자체가 ‘분부장’이었던 것입니다. 며칠이었지만 ‘부회장’이라는 직책의 세속적 무게에 조금은 우쭐해 있던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이 기회를 빌어 제 딸아이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 아빠는 본부장도 아니고 부회장도 아니고 영원히 분부장 할 거다”라고 말입니다.
젊은 시절 오랜 방황에서 얻은 신앙적 결단이나, 가치 있는 삶 같은 거창한 표현을 빌지 않더라도, 아이에게 영원한 ‘분부장’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실망을 주지 않는 아빠가 되기 위해서라도 저는 17년간 걸어온 이 월드비전 사역을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 나갈 것입니다. 아이가 어느 날 “아빠! 이제 분부장 그만해도 돼”라는 말을 할 때까지 말입니다.

박 준 서
(월드비전 아시아후원개발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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