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나는 ‘또라이’다!

2008-01-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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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 하늘에 잔별만큼이나 살림살이에 말이 많아지고 뒤숭숭해진다 싶으면, 만사 훌러덩 벗어 놓고 애마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사막을 달립니다. 모하비를 달립니다. 그리고 ‘죽음의 계곡’에서 죽어 봅니다.
그럴 때는 사막이 좋습니다. 심심하고 싱거워서 눈이 바쁘지 않아 좋습니다. 시간도 게걸스레 흐르지 않아 좋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오직, 침묵 뿐. 사막은 ‘나’를 내려놓는 연습을 하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입니다.
가볍게 들뜬 오감(五感)으로 나선 길을 한가로이 즐기다가, 눈길을 멀리 황량한 산자락에 주다보면, 가끔은 비늘을 반짝이며 느릿느릿 힘겹게, 산허리를 기어오르는 기차의 길고 긴 행렬을 봅니다. 작열하는 폭양을 속절없이 받아내며, 기차는 맨 몸뚱이를 태우고 태우면서, 기적도 목이 메어 쉬었다 갈 그 아스라한 산등성이를 기어이, 타고 넘습니다. 이내. 기차는 가쁜 숨을 쏟아내며, 단말마의 비명 같은 기적의 여운만을 허공에 남겨둔 채, 쓸쓸히 꼬리를 감춥니다.
고행입니다. 차라리 아름다움입니다. 아니, 끝내는 외로움이 되고 맙니다.
불현듯, 설운도의 애틋한 가락, 트로트 4/4박자 한 자락을 목이 터져라 뽑아 봅니다. ‘춘자야! 보고 싶구나./ 그 옛날 선술집이 생각나구나/ 목포항 뱃머리에서 눈물짓던 춘자야!/ 그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 나를 따라 천리만리 간다던 그 사람/ …/ 내 사랑 춘자야!/ …/ 그리운 춘자야!’
절규처럼 노래하다, 문득 생각합니다. ‘또라이…! 그래, 나는 또라이다!’ ‘또라이’라는 비속어는 약간 모자라는 듯한 사람을 비하해서 놀리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욕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별칭이기도 합니다.
이 또라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비속어들이 한동안,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똘끼’라는 신조어는 ‘또라이’적인 ‘기운’이 엿보인다는 뜻으로, 반짝이는 재치가 돋보이는 합성어입니다. 남보다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졌거나, 남과 다른 행동을 하는 친구를 일컫는 말이라고도 합니다. 남보다 튀는 개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청소년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신조어여서, 슬며시 이유 있는 실소를 자아내게 만듭니다.
어쩌면 또라이나 똘끼는 보통사람들이 거꾸로 살아가는 길을, 바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역설의 화신이신 성철 스님께서는 어느 날 이런 법문을 내리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과 거꾸로 살아라!” 시상에! 대선사께옵서 어찌.
샤카무니 붓다께서는 그 시원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인간은 근본 번뇌라는 무지에 휩싸여 탐욕과 이기심, 화석화된 고정관념, 그리고 편견과 차별심 등으로 뒤범벅이 된 채, 세상을 자기이해라는 좁은 대롱을 통해 재단하면서, 거꾸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들이 거꾸로 사는 줄을 모른 채, 모른다는 그것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기에, 스님께서는 차라리, 세상과 거꾸로 사는 또라이가 되라고 진정, 역설의 사자후를 토하셨던 것입니다.
성철 스님의 법문을 되새기다 스스로에게 다짐합니다. “나는 또라이다. 내 생명의 불꽃이 스러지는 그 날까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독(獨) go die’다.”

박 재 욱
(로메리카 불교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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