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고뇌하는 신앙인

2008-01-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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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위해 일합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영혼도 없고, 영혼이 없다면 예수님 당신도 진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던 테레사 수녀의 생살을 깎아내는 듯한 고뇌의 믿음 고백을 들으면서 과연 하나님을 믿는다는 믿음의 실체, 신앙인의 자세는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애당초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의 실체는 마치 개미가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말도 안 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깨달아 믿게 된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수준에서의 지적인 동의에 불과하다. 우리의 의식과 감각이 3차원 세계에 머무르고 있다면 믿음은 4차원이나 혹은 그 이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은 강렬한 소망을 가지게 된다. 초인간적인 상황과 기적을 일상의 삶 가운데 경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테레사 수녀가 고백했던 것처럼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참담한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서 비수처럼 마음에 꽂히는 공허함으로 인해 때때로 우리의 믿음 자체가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들기도 한다.
‘함께 당신을 믿을수록/ 마음에 자리하는 당신의 부재(不在)로/ 때로는 앞이 캄캄해지고/ 당신을 사랑할수록/ 당신의 오랜 침묵이 두려워지는/ 어둠의 순간들…’(이해인 시인의 ‘새로움의 강이 되게 하소서’ 중에서)
한국적인 기독교 정서에서 의심과 좌절하는 마음은 불신앙으로 인정된다. 신앙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사탄이 자꾸 의심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늘 들어왔기 때문이다.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모든 의심과 회의를 불신앙이라고만 몰아붙일 수 있을까? 때로는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의문들과 솔직하게 정면대결을 벌여서 고뇌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함으로 인해 한층 성숙된 신앙인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테레사 수녀만 고뇌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성 어거스틴도 하나님의 임재를 그리워하며 고뇌하는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 근대에 와서는 본 회퍼나 헨리 나우웬 같은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며 탐구하는 가운데 더욱 깊은 신앙의 경지에 이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고뇌하지 않는 신앙은 어쩌면 싸구려 신앙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잘되는 나’의 저자 조엘 오스틴 목사의 설교를 가끔 들으면 한편으로 도전받는 부분도 있지만 뒷맛은 버터를 너무 많이 먹은 것처럼 좀 느끼한 느낌이다. TV 부흥사로 잘 나가고 있는 베니 힌 목사를 위시한 26명의 부흥사들이 IRS의 세금 감사를 받게 됐다는 뉴스는 저들이 혹시 ‘잘되는 나’의 영성만을 너무 강조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한다.
오늘날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진정 세상을 변화시키는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필요한 신앙인의 이미지는 ‘잘되는 나’ ‘잘 나가는 우리 교회’라는 이미지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구하는 ‘고뇌하는 신앙인’의 모습일 것이다.
baekstephen@yahoo.com
백 승 환
(목사·예찬출판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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