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2008-01-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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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월 15일)은 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79번째 되는 생일이다. 그의 생일을 맞이하여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되돌아 보면서, 그가 미국의 역사발전에, 특히 흑인과 소수민족에 대한 인종차별 철폐와 인권신장에 이바지한 그의 공로를 되새겨 본다.
그는 1929년 1월 15일 조지아 주 애틀란타시의 침례교 목사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마이클과 같은 이름이 붙여졌지만, 아버지가 1935년 마-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도 마-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1955년 진보적인 학풍의 보스턴 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그때부터 그는 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에서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앙으로 신앙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 그는 원래 아버지가 지어준 마이클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해 오다가, 그가 성인이 되어 그의 여권을 만들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마-틴 루터 킹 2세”로 법적인 정정을 하였다. 그는 1954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 목사를 맡게 된다.
그러던 중 그 이듬해인 1955년 12월에 몽고메리에서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자가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지도하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이듬해에 미국 최고 연방법원으로부터, 그때까지 미국 남부의 일부 주에서 실시하고 있었던 “버스내의 인종 분리 법”이 미국의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위헌판결을 얻어 승소한다. 이후 그는 애틀란의 침례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계속 미국각지의 인권운동을 지도했다. 1963년 4월 12일, 앨라바마 주 버밍햄에서 열린 인종차별 항의 데모 때에는 스스로 시 경찰에 체포되어 4월 19일까지 구치소의 독방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 해 워싱턴 대행진 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그가 행한 연설인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인종차별 철폐와 각 인종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한 문체와 평이한 말로 호소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폭 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 연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인정되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 내 모든 흑인들이 그와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과격파들은 흑인 이슬람 지도자인 “말콤 X”를 지지하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반발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전개한 온건한 성격의 인권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학생 때 부모로부터 자동차를 대학입학 선물로 받을 만큼 부유한 집에서 자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출신배경도, 그의 온건한 민권운동이 일부 흑인들로부터 외면 받은 이유이다.
마침내 1964년10월14일, 그는 그 동안 꾸준하게 전개해 온 미국 내 인종편견을 종식시키기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 그 후에도 그는 계속하여 베트남 전쟁의 반대운동에도 목소리를 내었지만,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 되어가는 시기인 1968년 4월 4일 테네시 주 멤피스 시 한 모텔의 발코니에서 암살되었다.
미국정부는 그가 생전에 미국 내 인종차별 철폐에 공헌한 그의 업적을 기려, 해마다 그의 생일(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2세의 날”로 정하고 휴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금년은 1월 21일(월요일)이 그의 탄생 기념일인데, 이날이 되면 미 전국 모든 도시와 동네의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생일을 기념하고 그의 업적을 되새기는 각종 행사와 함께, 가두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 나라에서 소수민족으로 이만큼 대우를 받고 살게 된 이면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같은 많은 역사의 선구자들의 희생과 노력의 덕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310)968-8945.
http://www.newstarrealty.com
키 한
뉴스타 부동산 토랜스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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