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지혜’와 지식

2007-12-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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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참된 행복은 ‘지혜’를 접할 때 찾아온다. 그런데도 요즘 세상은 인터넷을 통해 지식은 무한정 얻어내지만, 주변에서 지혜는 점점 접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바쁘게 살다보니 좀처럼 사색할 틈이 없어지는 탓일까?
알고 보면 ‘지식’은 원래 우리 머리 속에 물을 부어넣어 채우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물을 부어넣으면 많은 물이 고이듯, 많이 배우면 지식도 자연 많아진다. 그러나 동시에 고인 물은 증발되기 때문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쉽게 말라버린다. 지식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계속 반복해서 공부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나이와 함께 기억력이 쇠퇴하여 점차로 녹슬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식과는 달리 ‘지혜’는 마치 옹달샘의 샘물과 같아 스스로 물이 계속 솟아오르기 때문에, 밖에서 물을 부어주지 않아도 마르는 일이 없다. 마르기는커녕, 오히려 넘쳐난다. 한 마디로 배우지 못하면 무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식이다. 그러나 ‘지혜’만은 이와 달라 교육을 받지 않아도 얻을 수 있다.
슬기로운 심성이 바로 지혜이기에 스스로 깨달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교의 문턱을 밟아 본 적이 없는, 시골의 무식한 아낙네나 촌로들에게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수많은 지혜를 발견할 때가 더 많다.
그 한 예로 공부를 하러 도회지로 떠나는 아들에게 “얘야, 길을 가다가 어두워지면 ‘등불’을 밝혀라. 행여 넘어져서 다치거나 길을 잃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거라”고 당부한 조병화 시인의 모친이 그렇다. 후에 예술원 회장까지 지낸 지식인이지만, 조병화 시인은 살아 생전 그의 일생을 통하여 그가 배운 그 어떤 지식보다도 무학인 어머니의 이 지혜 한 마디가 평생 삶에 더 큰 힘이 되어 주었다고 자주 실토하곤 했었다.
지혜란 바로 그런 것이어서 꼭 지식이 많아야만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어떤 때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오히려 철(?)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최근 한국 대선의 ‘BBK’ 김경준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식들도 낳아 키우다 보면,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인데도 제작기 성격이 다르듯 슬기로움 또한 같지 않다.
어떤 자식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마음을 쉽게 깨닫고 눈에 드는 짓을 잘하는가 하면, 어떤 자식은 기르기가 힘들 때가 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개개인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지혜는 ‘슬기로운’ 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치기 전에 무엇이 좋고 나쁜가를 쉽게 알아차리는 슬기이며, 시키기도 전에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 기쁜 마음으로 행동으로 옮겨가는 본성이 바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가 열리면 자연적으로 마음 안의 심성이 바르고 곱게 된다.
이 고운 마음이 바로 지식의 많고 적음에 상관 없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형성해 주는 근원이 되어간다고 본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이의 기쁨마저 자신의 것인 양 기뻐한다. 맑은 정신, 바른 마음, 착한 행실과 고운 심성이 형성되면, 그는 사람들뿐 아니라 하느님과 스스럼없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혜를 가지면 기쁨과 행복이 함께 함을 깨닫고 구약시대의 ‘솔로몬’ 왕은 재물과 명예를 제쳐두고 ‘지혜’를 하느님께 청한 결과, 전에도 후에도 없는 영화까지 누리게 된 모양이다.
요사이는 인공위성과 컴퓨터, 심지어 생명체의 유전자 게놈까지 밝힐 정도로 넘쳐나는 지식을 소유한 시대인데도, 그 옛날 솔로몬이 누렸던 영화는커녕 온갖 근심, 걱정, 불안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삶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노라면, 역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지식이 아닌 ‘지혜’에 달려 있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진다.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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