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역사주의와 예수 탄생

2007-12-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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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역사를 잘 연구하고 분석하면 인류가 살아 온 궤적과 패턴에서 일관된 역사적 법칙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또 그 역사적 법칙과 사회 진화적 법칙을 알게 되면 인류의 미래를 예견해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우리는 역사주의라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로 시작돼 플라톤을 거쳐 근대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근간으로 자리잡아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에 대한 고찰과 해석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주의 사회과학자나 철학자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란 어떤 위대한 민족, 지도자, 계급,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보편적 개인이나 여타 민족은 역사 발전에 중요하지 않은, 일종의 도구처럼 함부로 취급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계속 불행을 낳았습니다. 근대의 예로,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고집하는 히틀러의 인종주의가 나타나게 되고, 600만 유대인 학살과 2차 대전이라는 큰 불행을 초래했습니다.
종교사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세상을 역사의 무대로 보고, 사람은 그 무대 위의 배우이며, 그 무대 뒤에서 신이 역사의 시나리오를 써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유신론적 역사주의라고 하는데, 이 역시 사회과학적 역사주의와 비슷하게 종교인들로 하여금 오류를 범하게 하였습니다. 신은 특정 지도자나 민족이 세계를 이끌어 가도록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유신론적 역사주의는 유대인들에게도 자신들만이 세계를 리드하는 선민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타민족을 업신여겼습니다. 이런 현상은 타 종교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주의의 함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신이 사람에게 부여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인정해야 하는 도덕성을 부정하고, 어떤 특정 민족, 지도자, 계급, 교리에 의존하려 했습니다
성경 구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세계를 이끌어가는 선민이라는 생각 때문에 전쟁과 피흘림이 계속됩니다. 역사는 또한 이런 함정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인간 평등의 도덕성을 찾아주시려는 하나님의 숱한 노력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 구약을 찬찬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인간의 맹목적 신앙의 독선과 함께 이를 교정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노력을 밝히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왜 예수가 오시고, 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새 언약(신약)의 세계를 열어주시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끈질긴 유대인들의 선민 고집과 이를 깨뜨리고 평등사회를 구현하시려는 예수의 극단적인 자기희생이 서로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는 인류 전체가 하나의 사랑의 대상이고 그 모두가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예수 사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한 도덕성을 인류가 회복하도록 하는 운동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세계는 잘못된 역사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 평등의 도덕성 없이 내가 종교와 교회, 민족, 국가가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우월감이 숱한 전쟁과 분쟁, 피흘림과 파벌 싸움으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선민주의에 빠져 있는 오늘의 역사 속에 인류평등의 도덕성을 되찾아 주시기 위해 해마다 아기 예수로 다시 탄생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뜻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탄생을 해마다 되새겨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송 순 태
(해외동포 원호기구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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