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승욱이 이야기 - 나

2007-11-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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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다. 남편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고 공항 안 의자에 앉아 있다. 남편이 자꾸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에구…’ 머리 한번 쓰다듬고 한숨 한 번쉬고, 머리 한번 쓰다듬고 얼굴 한번 쳐다보고 완전 닭살커플도 아닌데 반복해서 이러고 앉아 있으니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계속 쳐다본다.
15년 전 남편을 만났을 때 남편은 날 어린아이처럼 생각을 했다. 나보고 ‘연구대상’이라고 불렀다. 험한 세상에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냐고 구박의 연속이었다. 나를 사귀는 첫번째 이유가 나 같은 어수룩한 사람을 험한 세상에서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주변에 똑똑하고 잘난 여자들이 그리고 마담 뚜쟁이들이 매일 중매 연락이 오는데도 줄기차게 나를 따라다녔다.
나의 어수룩함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남편과 연애시절 남편의 회사 근처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으면 물건을 강매하는 분들이 많았다. 일명 다단계 판매라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난 언제나 표적이 되었다. 보기에도 잘 넘어가게 생겼는지 일주일이 멀다하고 자석요, 화장품, 약, 건강식품, 자격증 취득을 위한 책, 게다가 지하철 입구에서 언제나 마주치는 ‘도를 아십니까?’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은 나 같은 유형을 너무 좋아했다. 남편을 기다리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강매한 물건을 한 한아름 안고 눈물 가득 고여서 남편을 기다리고 서 있으면 “에구, 또야? 또? 너 정신이 있는 애냐 없는 애냐?”
남편은 바로 종이를 꺼내서 ‘내용증명’을 작성한다. 다음날 우체국에서 가서 물건과 내용증명서를 다단계 회사에 부치는 일을 여러 번했다. 첫 아이를 낳고 방문판매를 하는 아줌마에게 속아서 정말 큰돈을 아이 책값으로 날리기도 했다. 남의 말을 너무 잘 믿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장난이 아니게 많았다.
그런 남편의 아내가 미국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대견해서인가 아니면 불안해서인가 계속 말없이 머리만 쓰다듬고 있다. “나, 많이 컸지?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나한테 안 속여. 걱정마. 내가 너무 바보 같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미국으로 보내셔서 성숙하게 만드셨나봐. 만약 예전 성격 그대로 한국에서 당신하고 살았으면 당신하고 벌써 남남이 되었겠지?”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이러고 계속 앉아 있다가는 ‘눈물의 공항’ 영화 찍을 것 같아서 서둘러 게이트로 들어가야겠다고 했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좋은 날 분명히 올 거야” “그럼 그래야지 당신이 연애할 때 그랬잖아. 하늘에 별이라도 따다준다고,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준다고 했잖아. 근데 지금 하늘의 별은 고사하고 흔한 건빵 안에 들어있는 별사탕도 못 얻어먹고 있으니 이거 말이 돼?”
돌아서서 게이트로 들어오는데 마음이 짠하다.
긴 공항 터미널을 걸어 들어가면서 송명희 시인의 ‘나’를 부르며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중략)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고. 남들이 가진 것 없는 승욱이 엄마이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많이 가진 자인 것을 안다. 그 엄마가 또다시 엄마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들에게 없는 것을 다시 품기 위해.

김 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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