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2007-11-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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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길

저마다 살아가는 길이 있다. 흔히 ‘인생 길’이라고 부르는 삶의 가치관이다.
삶의 길은 그래서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각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언젠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재식시 합천 해인사를 찾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인근에서 성철스님이 면벽수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비서를 시켜 만나보기를 청했다. 그러나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비서를 통해 전해진 말씀인즉 “당신과 내가 가는 길이 다른데, 만난다고 해서 무슨 득 될 일이 있겠소?”였다고 한다. 살생을 금하는 불도의 길과 권력을 잡기 위해 죄없는 광주 시민들의 생명을 무차별로 학살했던 권력자의 인생관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다.
인생 길 이야기를 꺼내면 혹자는 ‘내 인생 내가 사는데 무슨 참견이요’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인생살이에는 걸어야 할 길이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의 법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행동마저도 해서는 안 되는 일과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다는 말이다.
일례로 자기 몸이라 해서 제 맘대로 자해하거나, 마약에 취해 지낼 수가 있겠는가. 자기 재산이라고 해서 제 맘대로 흥청망청 뿌리고 다닐 수 있겠는가. 술에 취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면서 제대로 길을 걷지 못하는 주정꾼의 추태는 보는 이의 눈살 찌푸리게 한다. 걸어야 할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 술에 취한 사람만 인생 길의 주정꾼이겠는가. 돈에 취하고 권력에 취하고 쾌락에 취하면 그 누가 떳떳이 제 갈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일찍이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고백했다. 이상과 현질적인 삶 사이의 거리감, 그 괴리 앞에서 인간은 고뇌하고 자책하며 산다는 소리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고뇌를 일깨워내어 승화하기를 바라셨다.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셨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소크라테스도 부처도 공자도 감히 자신이 ‘길’이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내가 길이니 너희는 내가 사는 길을 따라오라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다. 하느님의 ‘완전성’이 아니고는 양심에 걸려 그 누구도 감히 꺼낼 수 없는 선언이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예수님께는 “나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성부)한테 갈 수 없다”고 하셨다. 이 한 말씀 안에서 당신의 신분을 드러내신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진리의 선포 말이다.
하느님은 진·선·미 자체이시며 사랑이시다.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길이며, 사랑으로 사는 삶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인간과 하느님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어 그 ‘길’로 걸어오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그 길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 길을 통해 우리는 오늘도 순례자의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김재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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