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2007-06-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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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존재

성서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을 자주 ‘질그릇’에 비유한다. 인간 삶이 질기고 아둔하고 척박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쉽사리 금이 가고 생채기가 생기는 인생살이 또한 넓은 의미에서 어찌 보면 질그릇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그 때문인지 ‘질그릇 같은’ 우리 마음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 이야기를 성가를 부를 때는 언제나 가슴이 찡해온다. 아마도 거칠고 투박하고 매끄럽지 못한 질그릇에서 우리네 인생의 애환이 드러나 보이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질그릇은 옹기장이의 손으로 빚어진다. 진흙을 가지고 옹기장이는 마음먹는 대로 질그릇도 만들고 항아리도 만들어낸다. 큰 그릇도 만들고 작은 그릇도 만들어 내는 것은 순전히 옹기장이의 몫이다. 인간도 옹기그릇처럼 하느님 손길에 의해 빚어진다.
어떤 사람은 도시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시골 아이로 태어난다. 부자의 자식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태어나는 것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마치 옹기장이의 손에 의해 질그릇이 빚어지듯,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인간이 탄생한다. 이것은 피조물의 원의와 상관없는 것이기에, 운명론자들은 운명과 사주팔자를 들먹인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보면 운명으로 간주해버릴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다. 역경 속에 태어나서 운명을 극복한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는데도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불운하게 사는 경우도 많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삶은 운명으로 결정되어지지 않는 ‘자유의지’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명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주의 선물이다. 그 실례로 카네기의 명저 ‘How to stop worrying & start living’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사업에 실패하여 파산선고로 무일푼이 된 남자가 더 이상 일어설 희망을 잃고 절망 가운데 길을 걷고 있었다. 바로 그때 건널목 길거리 맞은 편에서 다리 없는 사내가 나무 판자 위에 올라앉아 양손으로 땅을 찍으면서 길목을 건너오고 있었다. 도중에 눈이 마주치자 장애인은 밝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정말 아름다운 날입니다!” 순간 그는 그 장애인의 미소 안에서 자기가 아직도 정말 가진 것이 많은 부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그 후 절망을 딛고 일어선 나머지 전보다도 더 큰 사업체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절망 속의 그를 일으켜 세운 힘은 그가 벽에 써 붙여 놓은 글귀였다. “나는 하느님께 신발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하느님은 나에게 발이 없으면서도 밝게 웃으며 사는 사람을 보여주셨다.”』
정말 인간은 생각하며 살 수 있기에 운명과 환경마저도 극복해낼 수 있는 유일한 ‘영적 존재’다.

김 재 동 <의사·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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