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윤실 호루라기

2007-03-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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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종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미리엘 신부가 나온다. 감옥에서 탈출해 성당을 찾아온 장발장을 숨겨주고 먹여준 신부인데, 장발장은 성당의 금 촛대를 훔쳐서 도망간다. 달아나던 장발장이 경찰에 잡혀 다시 성당으로 오는데 신부는 경찰관에게 말한다. 그 촛대는 자신이 장발장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나는 지금껏 이 이야기가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과 용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설사 타인의 범법 행위에 의해 스스로 피해를 보았다고 해도 그 이웃을 공권력에 고발하는 것은 기독교인답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잘못을 징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소송 불가의 원칙은 기독교인 사이에서는 특별히 지켜야 할 일이라고 믿어왔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이 교인끼리 송사 하는 것을 극구 말렸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교회 분쟁이 일어나 경찰과 법원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부끄러웠고 절망했다.
얼마 전 기독교 윤리 실천위원회에서 한인타운 내 한 대형교회의 분규에 대해 논의된 적이 있었다. 교회의 재정적 불투명은 명백한데 교권을 쥐고 있는 분들은 관련 서류를 공개하지도 않고 그것의 공개를 원하는 인사나 단체(기윤실을 포함한)의 요청은 일체 무시해 버린 채 변호사를 통해 아주 무례하고 협박조의 편지까지 보내왔다. 공권력에 호소하지 않으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이런 경우에도 공권력에 호소한다는 것은 안될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기윤실 내에서도 나의 의견은 절대 소수였다. 공권력에 호소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그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다. 공권력에 의존하지 않고는 공의도 세울 수 없고 약자와 억울한 자를 보호할 길이 없을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보면 이분들의 생각이 마냥 틀렸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세상 권력은 가이사의 것이고 공중권세 잡은 자들의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혹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심을 믿는다면, 비도덕적인 이웃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는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고 시정을 소리쳐 요구하는 데까지이다. 더 이상은 국가 권력이 아닌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고 나는 믿는다. 섣불리 국가권력을 동원해서는 이웃을 보호하기보다는 이웃에게 군림하게 될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종교와 국가 관계에 대해서는 항상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종교와 국가에 대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또 하나의 사건은 요즈음 미주에 있는 목사님들이 한국의 한 크리스천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에 적극적이라는 소식이다.
실상 이것은 핍박받는 자, 버려진 자들을 위한 기독교적인 행동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내 눈에는 그저 권력에 줄을 서는 것 같아서 불쾌하게만 느껴진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가 다시금 집권자의 종교, 기득권층의 종교가 되기 위한 아름답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작태로만 보인다. 그래서 구토가 난다. 종교 지도자가 정치인 앞에 줄서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박 문 규 (캘리포니아 인터내쇼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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