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모습은 어디서 왔나?

2006-04-0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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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이 바지가 옷장에 걸려있으면 어디가 큰일나요? 빨래통이 민망해” “지혜! 책가방 좀 제자리에 갖다 놔!” “설거지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안보여? 이 고추가루?” “가위 또 어디 갔어? 뭐든지 제자리에 놔야지!” “밥 먹는 자세가 그게 뭐냐. 그렇게 앉으면 안되지…”
1950년 충남 서산 양반가문 예의, 교양, ‘제대로 하는 법’들을 상당히 강조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7남매의 셋째 딸, 아버님은 정확하시고 깔끔하시며 정리 정돈을 많이 강조하셨다. 방 벽들에는 7의 못이 있었고 각자는 정해진 자기 못에 옷을 걸어야만 혼나지 않았다. 손톱 깎기는 엄마 경대 왼쪽 앞에 있었어야 했고 가위는 경대 오른쪽 뒤에 있는 바느질 통 안에 항상 있었어야 했다.
물건뿐만이 아니었다. 언니하고 큰소리로 웃다가 “어허 여자애들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집에 돌아오시던 아버지께 크게 꾸중들었던 일, 걸음걸이가 여성답지 못하다고 여름방학마다 100 미터 선 위에서 이모님께 걸음강습 받던 기억, 웃을 때 입을 가리지 않아 이빨을 보였다고 꾸중듣던 기억, 아들들은 마당 치우고 나하고 언니는 마루 닦고 밥상에 수저를 놓으며 부엌일을 도울 때 칭찬을 받았던 기억, 아들들은 해수욕장에 가도 되고 딸들은 갈 생각만 해도 엄마한테 머리에 꿀밤을 맞았던 기억, 거짓말 한번 했다가 매맞던 오빠 등등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대뇌와 감정뇌에 가득 차있는 이런 생생한 기억들은 나를 한 여자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의 모습들을 나타낼지를 정해주는 기본바탕이 되었었다. 꼭 그렇게 살아야만 내가 제대로 사람처럼 사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드는 표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이 40 가까이 까지 난 내가 배워온 기준에 맞추어 사람을 판단하고, 사람들에게 그 모습대로 살기를 강요했고, 그렇지 못할 땐 ‘싸워서라도’ 그 모습을 만들어내야 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왔었다.
이런 일들이 어디 나 뿐이랴. 늦잠만 자면 심하게 야단치시던 엄마 밑에서 자란 남자가 6년 동안의 열렬한 구애 끝에 간신히 결혼을 성사시킨 후 신혼여행 첫날 아침 신부가 늦잠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화를 벌컥 내면서 “여자가 이렇게 근본이 틀려먹은 줄 몰랐다” 따지는 새신랑.
반면에 늦잠 자면 “얼마나 피곤했길래” 하면서 푹 쉬도록 방문을 닫아주며 배려해준 엄마 밑에서 커온 신부는 대낮에 웬 날벼락을 맞은 기분으로 “저 냉혈동물!” 하며 2-3주씩 냉전을 벌이다가 친정으로 도망가는 신부.
우리 중 아무도 태어날 때부터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말에 어떤 억양을 넣어 어느 정도 강조하며 살 것이라고 미리 결정하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다만 어떤 모습으로든지 꼴 지어질 수 있는 3,000억이 넘는 뇌세포만 가지고 태어난다.
그 세포들이 보고 커온 모습들, 강조 받는 모든 것들을 대뇌와 감정뇌에 (감정의 강도까지) 적립하면서 우린 성장한다. 그리곤 처해진 환경 속에서 부딪치는 상황에 따라 미리 적립된 그 모습들을 그대로 재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 중요한 사실은 우리 각자는 내 감정뇌에 익숙한 내 방식의 행동 모습이 ‘제대로 된 근본’이라고 느끼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옷이 제자리에 걸려 있어야만 된다고 교육받은 나는 방바닥에 있는 남편의 옷을 보며 “가정교육이 잘못 됐다”고 따지게되고, 사람 편안하게 해주시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내 남편은 나를 향해 “무슨 여자가 저렇게 까다로울 수 있을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국은 각자 자기 부모님 밑에서 강조 받으며 살아온 것들을 강조하게 되고 각자의 뇌에 익숙한 행동모습이 ‘근본’이라고 느껴지는 감정뇌의 반응 때문에 많은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을 편안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내 모습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게 익숙한 행동 복제를 위해 싸우는 것보다는 부부가 서로 편안하게 느끼고 가까워 질 수 있는 모습을 개발하는 것이 내 가정의 행복과 자녀들의 생동감을 위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모습 재정리 운동이 벌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순자 <상담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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