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멜로즈 패션가 ‘뜨는 30대’

2006-03-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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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생 동갑내기 두 패션 디자이너

‘열정’한마음

팔자란다. 그래서 뒤에서 날아오는 돌처럼 숙명 같은 것이어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란다. 결코 녹록치 않은 길에 들어섰지만 그래도 행복해 어쩔 줄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는 이들. 71년생 동갑내기 패션 디자이너 장세영, 조이 한씨에게 왜 디자이너가 됐냐는 질문에 둘은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은 대답을 쏟아 놓는다. 어릴 적 인형 옷을 해 입히던 열살짜리 계집애들이 자라 어느덧 서른 중반에 들어선 전도유망한 패션 디자이너가 돼버렸다. 그것도 세계 패션 메카로 떠오르는 멜로즈 한복판에서 몇 블럭을 사이에 두고 말이다. 이제 막 미국 패션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한 날개 짓을 하는 동갑내기 두 디자이너를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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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영씨의 웨딩가운과 들러리 드레스는 할리웃 스타들의 입 소문을 타고 유명해져 그의 부틱은 이제 멜로즈의 명소가 됐다. 3년내 서울은 물론 유럽 진출도 준비중이어서 제2의 베라 왕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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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에서부터 들러리, 신부 어머니까지 모두 세영씨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여동생 그레이스의 결혼식. 왼쪽부터 세영씨, 남편 헝 부씨와 딸 하나양, 어머니 장옥자씨, 뒤가 아버지 장지석씨, 이날 들러리를 선 여동생 줄리, 신부 그레이스와 남편 벤.

‘세영 부 퀴튀르’ 장세영씨

옷 만드는게 너무나 좋아 입문
하루 14시간 일해 4년만에 우뚝
전국 5개 부틱, 매출 150만달러

이제서른 중반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건만 그는 아직도 개구쟁이 소녀 같다. 말괄량이 삐삐 같은 눈매며 주근깨가 여전히 귀엽다. 그러나 언뜻 보기엔 고생 모르고 자랐을 이 소녀 같은 아줌마를 만만히 봤다간 큰 코 다친다. 전국에 5개의 부틱을 거느린 디자이너 겸 CEO라는 화려한 이력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의상학과를 졸업한 어머니 장옥자씨와 미시간주 현대자동차연구소 지사장이었던 아버지 장지석씨의 3녀 중 장녀인 세영씨는 86년에 미시간으로 이민 왔다.
피는 못 속이는 걸까. 어려서부터 그는 옷 만드는데 ‘신통방통’한 재주를 자랑했다.
열서넛이 넘어서는 바비 인형 옷을 만드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고 조금 더 자라선 자신을 비롯한 여동생 두 명의 프롬파티 드레스를 디자인하고 엄마가 재봉해 파티 장에 입혀 보냈다고 한다.
이처럼 옷 만드는 게 너무 좋았던 그가 패션공부를 하려고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그러나 엔지니어였던 부친은 명석한 딸이 옷 장사를 한다는 게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소원대로 그는 미시간 주립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게 된다. 그러나 가슴이 뜨겁던 세영씨가 그대로 주저앉을 리 만무.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 그는 다시 뉴욕 행을 택하고 거기서 패션 공부를 하려 했다.
그러나 부친은 여전히 결사 반대했고 재정적 지원도 끊겼다. 의절하다시피 뉴욕에서 2년을 버텼다. 결국 먹고사느라 그는 원하던 패션 공부는 하지 못했다.
덕분에 의류구매에서부터 의류 판매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진 일상에서 그는 세상을 배웠다. 그리고 2년 뒤 다시 그는 미시간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 졸업장이 절실했습니다. 고졸 학력으로 서바이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거죠. 그래서 전공을 바꿔 텍스타일과 사진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 그는 드디어 샌프란시스코 FIDM에서 패션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그는 ‘세영 부’라는 이름을 걸고 핸드백 디자인을 시작했다. 반응은 좋았다.

그러다 2002년 그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 LA로 오게 된다. 그리고 무조건 남편을 졸라 멜로즈에 부틱을 열었다. 연고도 지연도 아무도 없는 그가 그것도 서른이라는, 디자이너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무조건 저지르고 본 것이다. “아무 생각 없었죠 뭐.(웃음) 그냥 너무 옷을 만들고 싶었고,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처음엔 이 부틱에 반은 커튼을 치고 뒤에서 디자인하고 패턴하고 재봉도 직접 했습니다. 하루 14시간씩 일했지만 피곤한 줄 모르고 행복하게 일했습니다.”
그러다 멜로즈 거리를 샤핑하던 할리웃 스타들의 눈에 그의 옷이 포착됐다. 그저 그런 밋밋한 드레스가 아닌 컬러풀하면서도 우아한 그의 드레스가 소문이 나면서 옷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덕분에 첫해 매출액은 15만달러. 그 뒤로 4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전국 5개의 부틱과 직원 35명을 거느린, 연 매출 150만달러의 유명 디자이너로 변신했다.
그의 야무진 꿈은 현재 서울 부틱 오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의 꿈엔 브레이크란 결코 없을 듯 싶다.



빈티지 붐타고 6년만에‘내 브랜드’로

‘붐’조이 한씨

노스트롬 - 프레드시걸 등
500여개 소매업소에 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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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패션위크 벤츠 패션쇼 준비로 여념이 없는 ‘붐’ 조이 한 사장. 빈티지 앤 섹시 컨셉으로 할리웃 스타들은 물론 한류 스타들도 그의 브랜드 매니아가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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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즈 붐 매장에서 샤핑을 하고 있는 고객들. 이곳엔 주로 펑키하면서도 남들과 독특한 디자인을 찾는 패셔너블한 패션리더들이 단골들이다.


그의 패션은 펑키하다 못해 튄다. 그러나 그런 톡톡 튀는 디자인을 해내는 조이 한씨는 참 조용조용하고 단아하다. 도대체 이렇게 얌전한 여자가 어떻게 이렇게 도발적인 디자인을 해내는 걸까 신기할 지경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빈티지 앤 섹시 컨셉을 추구했어요. 붐이라는 브랜드 네이밍 역시 그런 의미를 담고 있고요. 다행히 요즘 빈티지 스타일이 유행이어서 고객들의 반응이 좋습니다.”
사실 조이씨는 자신의 부틱을 열기 전부터 자바에서 잘 나가는 유명 디자이너였다. 워낙 감각 있고 야무진 솜씨로 이곳 저곳에서 모셔가기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고 한다.
“한 6년 일했는데 한달 급여가 8,000달러 정도여서 그냥 이렇게 편하게 살까도 생각했죠. 그러나 정말 내 브랜드를, 내 디자인을 무대에 올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붐을 런칭했습니다”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그동안 모은 돈 전부를 털어 멜로즈에 붐을 런칭했다. 처음엔 자바 디자이너와 부틱 일을 겸했다.
당연히 고객들 반응을 일일이 알아볼 수도, 매출도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이왕 저지르는 김에 ‘올인’을 택했다. 2년 전부터는 풀타임으로 꼬박 붐에 사활을 걸었다. 덕분에 밤잠 설쳐가며 디자인부터 패턴, 재봉까지 혼자 도맡아 한 결과 붐은 현재 노스트롬, 프레드 시걸 같은 대형 업체를 포함, 전국 500여 소매업소에 옷을 납품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결과, 지난 21일 그는 LA 패션위크 벤츠 패션쇼에 당당히 자신의 작품들을 올리게 됐다.
“자바에서 일하면서 좋은 원단,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하이엔드 의상을 만드는 게 꿈이었습니다. 주변에선 멜로즈에서, 그것도 신진 디자이너의 옷을 300~500달러씩 주고 누가 사 입겠냐고 했지만 지금은 할리웃 스타들을 비롯, 관광객들에게도 반응이 너무 좋습니다”
린지 로한, 니키 힐튼, 패리스 힐튼 등 할리웃에서 내로라 하는 패션 리더들이 그녀의 옷을 입고, 한국 스타들도 LA 방문 길에 그녀의 매장은 반드시 찾는다고 한다.
디자이너와 비즈니스 우먼으로서도 수완이 대단한 그는 그렇다고 미국에서 전문적인 경영인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한씨는 ‘그냥’ 1세다. 한국에서 가수 김완선과 민혜경의 백댄서로 활동하다 자신의 음반까지 낸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그러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96년 무작정 LA로 건너와 패션스쿨을 다녔다. 그래도 2년 동안 전교에서 1명 주는 전액 장학생으로 학교를 졸업할 만큼 승부근성 하나만은 그때도 대단했다. 그리고 그 승부근성 만큼이나 열정적인 꿈 역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글 이주현 기자·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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