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3-2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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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의 방문

한국에서 언니 세분이 오셨다. 언니들이 한꺼번에 세 명이나 오셨다고 하면 “언니가 도대체 몇 명이냐”고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친정은 1남6녀 7남매, 오빠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딸 여섯만 남았다. 여섯 자매를 숫자로 대입해 설명하자면 1, 3, 4번이 한국에 살고있고 2, 5, 6번이 미국 LA에 살고있다. 나는 5번으로 언니가 넷이고 밑으로 막내 여동생이 있다.
형제가 많으니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이렇게 많아도 다 자라서 뿔뿔이 출가하고 나면 한자리에 모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많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이번에 오신 언니 세분은 1, 3, 4번이 아니라 3번과 4번, 그리고 올케언니다. 미국 방문이 처음인 올케는 꽃다운 나이 서른에 혼자가 되어 지금까지 재혼하지 않고 우리집 귀신이 되어 살아온,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열녀다. 23년전 먼저 간 오빠를 원망하지 않고 두살, 세살이던 아들딸을 혼자 키우며 우리 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다. 상처가 얼마나 많았으랴마는 너무나 착하고 반듯하게 자란 두 조카를 보면 그저 고맙고 장하고 대견할 뿐이다.
큰언니 한 분 빼고 우리집 여자 여섯명이 한데 모인 셈이었다. 얼마나 신나고 즐거웠는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고만고만한 중년여자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며 먹고 수다떨고 샤핑하느라 하루하루가 만화책장 넘기듯 훌떡훌떡 지나갔다. 다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더 좋았겠지만 이곳의 언니와 동생이 비즈니스 때문에 며칠씩 시간 내기가 어려웠고, 각자 안 가본 여행지를 찾아 일정을 맞추기도 쉽지 않아 그냥 LA에서만 당일치기로 돌아다녔다.
여자들의 놀이 첫째는 물론 샤핑. 처음에는 “별로 살 것도 없다”던 언니들이 일단 나서자 몸 바쳐서 샤핑에 몰두하였다. 첫날은 라치몬트 거리를 한차례 휩쓸고 다운타운 주얼리 샵과 더 그로브를 섭렵하면서 물건을 사들이더니 다음날부터 아울렛, 코스코, 마켓, 약국… 틈틈이 남는 시간을 이용해 미용재료상도 가고, 일란구두에 들러 사스 신발도 샀다.
분명히 세 언니 모두 퇴행성관절염에, 디스크가 있다며 여기저기 쑤시고 아파서 오래 걷거나 서있지 못 한다고 했었는데, 아울렛에 간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8시간 이상 쉬지 않고 걸어다니며 샤핑했지만 어느 누구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밤이 되어 매장들이 문을 닫자 나머지 돌아보지 못한 곳들이 아쉬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휴가를 내어 꼬박 나흘을 아침부터 밤까지 운전사 겸 샤핑 가이드로 뛰었는데 여러 사람이 다 함께 그렇게 많은 물건을 사는 것은 처음 보았다. 네명이 몰려다니면 각자 원래 계획보다 네배씩은 더 사는 것 같았다. 살 생각이 없던 물건도 한 사람이 집어들면 다른 언니들도 ‘나도 나도’ 하면서 하나씩 집어들었고, 다들 비슷한 또래의 딸들이 있는지라 젊은애들이 좋아할만한 옷만 보면 다같이 한벌 두벌씩 사들였다. 모든 것이 한국과 비교해 ‘너무나 싸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니 어느 틈에 한국이 그렇게 비싼 나라가 되었을까.
일요일에는 여섯 자매가 다같이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을 돌아보고 팜 스프링스에서 온천을 하였다. 다음 날에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갔고, 라우리스 프라임 립 디너를 먹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풀로 뛴 후 넷째 언니는 딸이 있는 시애틀로 떠났고, 셋째언니와 올케언니는 지금 관광버스로 4박5일 서부일주 여행중이다. 돌아오면 바로 다음날 다같이 서울로 떠나게 된다.
매일 만나고, 쉬지 않고 수다 떨고, 아무리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어도 떠날 때가 되면 언제나 서운하고 미진한 마음이 된다. 못 다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고, 더 잘 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고, 이제 가면 또 언제 보나 싶어지면서 섭섭하기 짝이 없다.
언니들도 그랬나보다. 여행 떠나고 나서 이틀이 지난 후 내 핸드백 속에서 카드 하나를 발견했다. 셋째언니가 나 모르게 돈과 함께 넣어둔 카드였다.
“숙아. 참 많이 고마웠어. 귀중한 시간과 몸과 돈을 내주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샤핑도 즐길 수 있었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보답할 길이 없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언제 다시 볼지… 젊음을 계속 유지하고 다음에 만날 때도 예쁘게 하고 살고 있길 바란다. 원겸이 귀엽게 착하게 잘 키웠더라. 걔 대학 들어가고 좀 덜 바빠지면 여행 가자. 원겸 아빠도 잘 거두고… 건강 최우선으로 챙겨라. 짠니복(언니의 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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