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잉꼬부부는 만들어가는 것”

2006-03-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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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꼬부부는   만들어가는 것”

젊은 부부들과 얘기하는 것이 즐거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최석봉·선자씨 부부가 저녁식사를 담고 있다. 사진 왼쪽은 이날 모임을 주관한 집주인 홍삼열씨.

“잉꼬부부는   만들어가는 것”

11일 정기모임에 자리를 함께한 ‘나의 사랑…’ 회원들. 왼쪽부터 임현준·성숙, 이재춘·신금녀, 최석봉·선자, 김용환·의숙, 홍삼열·영미, 피터·줄리아 정, 이태홍·봉순 부부. 이날 회원들은 ‘부모’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부부는 그 인연만으로도 화두다. 너무나 익숙해 그만큼 잘 알고 있다 믿어보지만 잠든 얼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 생판 남인 듯 내 남편의, 내 아내의 속마음을 영 모르겠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일까. 세기를 넘나들며 부부는 소설 속, 영화 속의 혹은 TV 드라마 속의 소재로 마르고 닳도록 쓰여왔고 그 소재가, 그 주제가 신파이면 신파일 수록 그 위력은 더 컸다. 아마도 부부가 사는 게 그 신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1세기 부부의 모습은 살짝 살벌해지려 한다. 혼수 문제로 부부가 혹은 고부가 주먹다툼 끝 갈라서고, 보험금을 노린 아내가 청부살해를 계획하기도 하고, 사기 결혼으로 법정에 서 피 튀기는 한판승을 벌이기도 하는 등 현대의 부부 자화상은 좀 처참하고 끔찍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세상은 꼼꼼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아름답고 살맛 나는 법. 여기 아직도 서로를 사랑하며 신뢰하고 아름답게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부부들이 모였다. ‘나의 사랑, 나의 프로포즈’라는 조금은 괴이하게(?) 닭살스러운 이들 부부모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닭살 부부들의 모임 나의 사랑 나의 프로포즈

라디오 편지공모 입상 인연


9년전 창립 멤버들
낙오자 한명도 없어

부부관계 주제 정해
모임마다 열띤 토론

11일 오후 6시. 어둠이 이제 막 내려앉기 시작하는 칼라바사스 한 주택가에 한인 부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난 달 팜스프링으로 여행 가려던 것이 이런저런 이유로 취소되는 바람에 이날 모임은 두 달만의 만남이 됐다.
이들이 ‘나의 사랑, 나의 프로포즈’라는 모임을 꾸려 온지 햇수로 이제 만 9년째. 30대이던 신혼부부들이 이제 중년의 부부가 됐고, 갓난아기이던 부부의 자녀들은 이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새로 모임에 가입한 회원들도 있지만 초창기 회원들이 꾸준히 한 쌍의 낙오자도 없었다고 하니 모임의 충성도 만큼은 월드컵 4강 신화의 ‘붉은 악마’가 부럽지 않다.
도대체 강산이 한번 변할 시간이 흘렀어도 이들이 한결 같이 이 모임에 목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부부들이 모여 뭘 어쩌기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늘 설레는 마음으로 모임을 찾는다는 것일까.
이들 모임의 기원은 지난 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가을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주최한 ‘나의 사랑 나의 프로포즈’라는 편지 모집에서 입상한 이들이 의기투합해 부부모임을 만들었고 모임 이름을 그냥 공모전 이름과 같이‘나의 사랑 나의 프로포즈’로 지었다고 한다. 모임의 회원은 현재 9쌍으로 총 18명이다. 그러나 ‘나의 사랑 …’는 여느 친목모임과는 다르다. 모임 때마다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이 이 모임의 가장 큰 특징인데 바로 이 특별한 토론이 ‘나의 사랑… ‘모임을 9년째 끌고 온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 모임 초창기 회원인 피터 정씨는 “사실 부부라고 해도 살면서 이야기를 많이 안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평범하지만 부부관계에 대해서 사소한 것이라도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다보면 서로를 이해하게 돼 부부 사이가 더 좋아진다”고 말한다.


“내숭떠는 부부는 못오지요”

자녀교육에서 부부 성문제까지, 오픈 마인드 없으면 ‘서바이벌’ 힘들어

부부얼굴 마주보면 껄끄러운 주제들은 분반토론
40~70대등 다양한 연령층… 갖가지 해법주고 배워

어떤 이야기 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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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이 있는 날이면 아이들도 덩달아 즐거운 날이다. 임성숙(왼쪽), 김의숙씨가 아이들의 저녁식사 준비를 도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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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전 여성회원들이 모여 티타임을 가지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두 달만에 만난 탓인지 이들의 이야기꽃은 끝이 없었다.

이들의 토론 주제는 방대하기 짝이 없다. 자녀교육에서부터 고부간의 갈등, 권태기 극복 법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 소소하게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이들의 도마 위에 올려진다. 게다가 부부의 성 문제까지 적나라하게 주제에 이름을 올린다고 하니 이들 모임에서 내숭은 결코 통하지 않을 밖에.
임성숙씨는 “오픈 마인드가 없으면 우리 모임에서 서바이벌 하기 힘들다”며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고민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다른 부부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서로 해법을 찾아가는 게 이 모임의 묘미”라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부부싸움으로 뾰로통해진 부부들이 어색하게 들어와 열띤 토론을 벌이다 보면 자연스레 다시 손 붙잡고 나가는 경우가 다반사.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손 쳐도 그날 토론에서 아내의 혹은 남편의 흉이 도가 지나쳤다면 돌아가는 차안에서 싸우게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물어보지만 웬걸. 이들은 한결같이 ‘그런 일은 절대 없다’고 못박는다.
김의숙씨는 “그렇게 한번이라도 싸우면 다시 이 모임에 어디 나올 엄두가 나겠냐”며 “오히려 평소 서로에게 못했던 이야기들을 정색하고 나눌 수 있어 부부에게 너무 소중한 시간”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부부가 얼굴 보며하기 껄끄럽거나 힘든 주제들은 아내와 남편들이 나눠 분반(?) 토론을 거친 뒤 토론 내용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이들은 토론 속에서 최대한 솔직한 이야기와 내실있는 해결책을 내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뿐 아니다. 부부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사적인 공간에 갇히는 것을 막기 위해 1년에 1~2차례정도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갖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임상심리학 박사와 한의사를 초청, 부부 심리와 중년의 건강에 대해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래서 우리 모임이 최고


모임 회원들이 꼽는 ‘나의 사랑…’의 최대 매력은 역시 다양한 연령층. 40대부터 70대 부부가 섞여 있다보니 문제의 해법도, 접근방식도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 1세 부부들을 열광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줄리아 정씨는 “나이 많은 부부들이 내놓는 해법은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어서 살면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며 “생활 속에서 어떤 문제가 닥치면 인생 선배들의 경험담이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정씨의 말에 질세라 이 모임의 최고 연장자인 이재춘(73)씨는 “오히려 젊은 부부들이 늙은이 말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오히려 젊은 세대들에게 배우는 것도 많고 생각도 젊어지는 것 같아 이 모임만은 열일 제쳐두고 온다”고 말한다.
또 회원들은 마음속으로만 하는 약속이 아닌 공개적으로 가족과 아내와 자신과 한 약속이기에 이를 지키려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레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된다고 입을 모은다.
김용환 회장은 “아내와 회원들 앞에서 앞으로 어떤 남편, 아빠가 되겠다고 약속을 하면 안 지킬 수가 없다”며 “이런 보이지 않는 강제가 회원들의 가정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사랑… ‘의 가장 큰 매력은 적어도 한 달에 한번씩은 부부가 공개적인 소통의 공간에서 멍석 깔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다는데 있다.
세상 사람들이 ‘무촌’이라는 무시무시하게 친밀한 관계로 규정짓지만 살다보면 남보다 더 멀어질 수 있는 부부간에 할 얘기 안 할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다보면 서로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계는 노력으로만 빛이 난다. 설령 무촌인 부부지간이라 할지라도 그냥 무심하게 내버려두면 때가 끼고 균열이 가게 마련이다. ‘나의 사랑…’ 회원들은 이 평범한 진리를 아는지라 부부라는 익숙한 관계에, 그래서 깨지고 상처받기 쉬운 관계에 때 빼고 광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그 노력의 대가로 10년 전 혹은 40년 전 주례 선생님 앞에서 사랑을 맹세한 당시처럼 여전히 사랑하고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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