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샌타모니카의 일요일’

2005-12-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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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셋째 일요일, 샌타모니카는 나른한 고양이처럼 햇볕에 졸고 있다. 이어폰을 꽂고 작은 아령을 쥔 금발의 아가씨가 두 주먹을 흔들며 잰걸음을 걷는 보도를 따라 가면 녹색의 띠처럼 잔디밭은 이어지고 그 잔디밭의 벤치마다엔 털북숭이 방랑자들이 때에 절은 담요를 대충 두르고 와불처럼 늦잠을 자고 있는데, 어느 중생에게 바친 공양인지 발치에 찢어져 흩어진 패스트 푸드 봉지엔 작은 새와 겁많은 다람쥐가 넘나들며 번갈아 예불을 한다.
야자수 그늘은 이미 비켜가 울타리의 짙붉은 꽃더미 너머엔 푸르른 수평선이 걸렸는데, 그 꽃가지로 다가가면 그다지 높지 않은 벼랑이 발아래 내려앉고 그 앞 텅 빈 너른 모래밭은 지난 여름의 흔적들을 샅샅이 갈쿠리질하여 간내 나는 바람에 날려보내고 있다. 그 바깥, 끝없이 넘실대는 바닷물은 곰삭는 포도주처럼 가장자리에 가는 거품띠를 보글거리며 고즈넉이 초겨울 햇살 아래 반짝인다.
발걸음을 돌려 붐비지 않는 신호등의 배꼽을 누르고 기다린다. 몇 대의 차들은 운동회의 출발선 앞에 쪼그린 아이들처럼 얌전히 모아서고 길 건너 네모진 눈은 당신은 이제 안전하다며 깜박깜박 건너오기를 재촉한다.
높지 않은 빌딩 사이 곧게 뻗은 길에는 잡상인들과 농부들의 장이 섰다. 픽업 트럭과 봉고차들을 길가에 세워 두고 작은 천막을 줄지어 친 가게들이 난전을 벌였는데 사과 상자 위에 올라가 박수치고 건중건중 뛰며 각설이 타령, 몽땅떨이 타령하는 목쉰 아저씨도 없고, 한 손으론 김이 오르는 국밥솥을 휘저으며 다른 손으론 놓칠세라 손님을 바삐 부르는 다부진 아줌마도 없다. 얌전히 붉은 앞치마를 두르고 캡을 쓴 초로의 백인 남자가 조용히 물건을 간추리고, 손님이 조용히 물어보면 웃으며 조용히 맞이한다. 장난감 등속을 벌여 놓은 동양인 부부도, 장신구를 걸어 놓은 젊은 흑인도, 장사는 그저 한나절의 잠시 여흥일 뿐 눈동자엔 쪽빛 수평선이 출렁이고 가슴엔 찰랑대는 물결소리가 닿아 있다.
장터 저편으로 듣지 못했던 북소리가 들린다. 네 거리 구석 어느 빌딩 처마 밑에 갈래갈래 머리를 꼬아 땋은 흑인 여자가 야생마처럼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를 벌리고 플래스틱 빨래가루 통을 타고 앉아 엎어 놓은 가루통들을 드럼처럼 신나게 두드리는데, 갑자기 그늘로 눈을 돌린지라 그녀의 번득이는 흰 눈자위와 크게 웃는 흰 이빨만이 우선 드러나니 저절로 내 얼굴도 활짝 열리는 기분이다.
조금 더 가니 길바닥에 작은 앰프를 갖다 놓고 기타 치며 노래하는 백인 남녀가 있다. 조금 통통하고 키가 크지 않은 그 여자가 가락에 맞춰 맨발을 타일 바닥위로 옮길 때마다 풍화된 대리석 조각처럼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흰 망사옷 위에서 물결치는데, 비행기 구름이 길게 이지러져 가는 빌딩 사이 하늘을 쳐다보며 내뽑는 알지 못할 저 노랫말과 가락은 지중해의 어느 섬 그늘에서 비롯한 것일까, 서역의 모랫바람 속에서 전해져 온 것일까? 낡은 악기 상자에 떨구어지는 동전을 가끔 알은체하며 수그려 기타를 치는 저 사내는 가락을 만들려 줄을 퉁기는 것일까, 줄을 퉁기니 가락이 되어 나오는 것일까?
아름다운 사바의 한 나절은 기울어 가는데.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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