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선교의 미래 - 조선족교회 방문기 3?
중국 영구서 1942년에 태어난 이해룡 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 해외 선교단체들이 몰래 들여보내는 성경책을 처소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했다. 20여년 전의 일이다.
이에 앞서 문화혁명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부르조아로 낙인이 찍혀 수없이 매를 맞았던 경험이 있다.
공교롭게도 예수를 믿게된 것도 이 때다. 처고모를 통해서다. 짚단 속에 숨어 찬양을 하곤 했던 그녀는 만날 때마다 “예수 믿으라”고 권했다. 이 목사는 “불쌍해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성경은 미국에 거주하는 김 모 장로가 공급하는 역할을 했고 홍콩을 통해서 들어왔다. 물건을 두 개의 큰 여행가방에 담아 보내면 덩치 큰 외국인 여행자가 세관을 통과할 때 들고 들어왔다. 한국 사람 체격으로는 감히 들을 수 없는 무거운 가방인데도 체격이 좋은 외국 여행자는 양쪽에 하나씩 너끈히 들을 수 있었고 세관원도 외국인이 많지 않던 시절이어서 사람을 구경하느라 짐을 잘 조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통관이 된 성경은 중국 광주를 거쳐 북경과 동북 3성에 주로 공급됐다.
처소교회는 서로 연결이 잘 돼 있어 주소와 이름을 받아 한 교회를 찾아가면 쉽게 주변의 다른 지역에도 배포가 됐다. 처소교회는 작게는 2-3명이 모이는 곳이 있었고 20여명이 모이는 큰 곳도 있었다. 당시는 한족 교회가 별로 많지 않았는데 90년 후반부터 크게 부흥하기 시작했다 한다.
조선족 교회도 북경 아시안게임 이후 성장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성경은 85년부터 중국에서도 출판됐지만 품질이 좋지 않아 모두 한국 성경을 원했다.
이 목사는 자신을 시켜 성경 전달 사업을 했던 김 장로가 LA에 거주하는 분이었다는 것 외에는 그의 인적 사항을 잘 모른다. 나이나 고향, 직업을 물으면 “그런 거 알 필요 없다”고 핀잔만 먹었다. 그의 임종 소식도 나중에 어느 성경 공부 시간에 다른 조선족을 통해 들었다.
김 장로의 설교를 듣고 처음 감동을 받은 이 목사는 말 뿐인 신앙을 벗고 여기 저기 쫓아다니며 성경공부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홍정길 목사도 만났고 차영준 목사는 97년에 알게 됐다. 당시 탈북자 선교를 하고 있던 은춘표 장로를 통해 워싱턴 신학교 통신과정을 밟기도 했다.
2001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지금은 아들 이창은 전도사와 함께 조선족교회인 단동평화교회와 평화한족교회를 이끌고 있다. 이 교회들은 특정 교단에 소속돼 있지 않다. 이 목사는 “어차피 한국 노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교회니까 상관없다”고 말했다.
<계속>
<이병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