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등에 올라 세상에 내지른 해방감

2004-10-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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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주말나기
60세에 승마 시작한 주부 민영옥씨

민영옥(60, 주부)씨는 한 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애마부인이 될 운명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주말까지 바쁜 딸과 사위를 위해 손자 모세 구(7)군을 데리고 LA의 이곳저곳을 섭렵한 지 오래. 곳곳에서 열리는 축제에 가서는 다른 것 다 놔두고 꼭 당나귀를 타고야 말겠다는 손자를 위해 지난 주말 그녀는 아예 말을 타러 길을 나섰다.
덜컹 말 등 위에 올라 앉아 무조건 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마구간에서 데려나와 털을 빗겨주고 당근을 먹이는 모든 과정을 함께 했다. 애초에 한 두 시간 얄밉게 승마만 하고 갈 생각은 없었다.
자라나는 손자에게 무엇보다도 말이라는 생명체와의 아름다운 교감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 서두르지 않는 그녀에게 이 모든 과정은 느리게 즐기는 유희였다.
말만큼 아름다운 피조물이 세상에 또 있을까. 탄탄한 근육에 군살 없는 엉덩이, 흩날리는 갈퀴, 그리고 양순한 성품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커다란 두 눈. 그들은 고대로부터 수많은 조각가들의 예술 혼을 자극할 만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 아름다운 것은 말을 달리는 인간. 석양녘의 바닷가에서, 그리고 풀 향기 가득한 산길에서 자세를 꼿꼿이 세운 기수가 말을 타는 모습은 차라리 한 폭의 그림에 가깝다. 살바토르 달리의 그림, 말을 타는 고디바는 얼마나 관능적이면서도 거룩하던가.
자신을 깨끗하게 단장해주고 먹을 것을 준 그녀를 말은 체취와 함께 기억한다. 처음 타 보는 터라 덜컥 겁이 나기도 했지만 베테랑 교관은 말 위에서의 첫 경험을 두려움이 아닌 즐거움으로 기억되게 이끌어주었다.
뚜벅뚜벅 걷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자 이번에는 허리를 꼿꼿이 세워 상체를 약간 뒤로 젖혀보란다. 고삐를 조이며 발로 신호를 보내자 말은 잘 조련된 준마처럼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시원스레 들판을 달렸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말 위에서 그녀는 해방감에 사로잡혀 큰 소리로 환호를 지른다. 주변의 나무와 꽃, 풀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보내온다. 힘을 쓰는 것보다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한 시간 남짓 말과 시간을 보내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승마를 하면 우리 몸의 심폐기능이 강화되고 몸의 진동으로 소화 기능과 혈액 순환이 촉진된다.
아침 이른 시각, 아직 깨어나지 않은 대지에 가득 찬 생명의 에너지와 상쾌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호흡할 수 있다는 것도 승마의 또 다른 매력. 대자연에 안겨 생명체와의 교감을 이루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동안,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국에서는 승마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 신흥 귀족이나 즐길 수 있는 사치 레저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한 달, 4차례 승마에 드는 비용이 100여 달러로 어느 운동에 못지않게 저렴하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부담 없는 스포츠인 것.
처음에는 쭈삣 하던 손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려올 생각을 않는 것이 말 타는 것이 여간 좋지 않은 눈치다. 다음 주에는 아예 말에게 줄 당근 봉지까지 미리 챙겨두어야겠다. 높아만 가는 가을 하늘 아래 말을 달리며 보낸 주말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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