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2004-10-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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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사건

지난 주,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는데 그 사이에 모두들 열심한 크리스천이 되어 있었다. 30년 동안 헤어져 있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한길로 다시 만나고 있었다는 감사가 새로웠다.

그 옛날 한국의 재수생들은 파릇파릇 피어나는 대학 1년 생보다도 늙어 보였다. 머리는 푸시시, 어깨마저 구부정한 채 햇빛 안 드는 광화문 뒷골목으로만 걸어다니던 나의 재수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부산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아아, 대학이 뭐 별거냐. 삼차 방정식에 물리, 화학이 나의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더냐, 하면서 우리들은 해운대로 향했다. 용돈이란 게 날마다 쪼들릴 뿐 남는 법이란 절대로 없어서 부모님께 갖은 잔머리를 동원하여 울거낸 허위 참고서 책값을 모아 공금으로 쓰기로 했다.
기차는 밤새 쉬다 가다 어느덧 부산역이 되었고 일행은 역전 가께우동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아직도 어스름 새벽, 다시 버스를 타고 찾아간 남해 바다는 입시에 낙방한 18세 청소년 다섯 명의 쓸쓸한 가슴에 철썩이는 파도로 다가왔다. 우리는 조그만 더플백들을 해변에 내동댕이치고 바다로 뛰어갔는데 그 때 수평선 저 만치서 떠오르던 아침 태양의 찬란함!
우리는 무슨 여관인가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쓰러져 그간 밀렸던 잠을 잤다. 활짝 피어나야 할 틴에이저 시절을 고된 과외수업과 시험으로 밤을 새우느라 쪼그라들었던 심신을 낯선 여관방에 눕힌 채 실컷 자고 나니 새로운 힘이 솟는 듯 했다.
“얘들아, 아버지 책상 서랍에서 훔쳐 왔다!” 한 녀석은 담배를 꺼냈고 “난 병째 숨겨왔는데!” 독한 양주도 나왔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처엉추운은 즈을거워!!!” 어디서 주워들은 유행가 가락을 읊어대며 우리는 시간을 잊어갔다.
휘영청 달 밝은 밤, 바닷가로 나섰을 때 우리들은 조금씩 취해 있었는데 그때 저만치 눈이 번쩍 뜨이게 예쁜 20대 아가씨가, 그것도 혼자서 천천히 걷고 있는게 아닌가. A가 기회를 놓칠세라 아가씨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달밤에 혼자 걸으시는 모습이 마치 비너스 여인상 같으십니다.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저와 ....” 미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뽀빠이 만화영화 속의 힘센 부르토 같이 우락부락한 사나이가 다짜고짜 가련한 A의 등덜미를 쥐었다.
“얌마, 너 어디서 내 애인을 감히!” 알고 보니 이 두 남녀는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밤의 해변을 산책하는 중이었는데 여자가 일부러 서너 걸음 앞서 가며 남자의 애를 태우는 씬을 연출하던 모양이었다.
서슬 퍼런 부르토는 어느 환한 가게 앞으로 A를 끌고 갔다. “이거 불빛에서 보니까 너 아직 새파란 고등학생이구나! 어느 학교야?” A는 애처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형님! 모모 고등학교 졸업했습니다.” 순간 부르토의 얼굴이 좀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그래? 내가 그 학교 나왔는데. 너 그럼 교가를 불러봐라. 가짜 학생이면 가만 안 둔다!”
A는 달빛 부서지는 밤바다를 배경으로 고래고래 교가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래, 가봐라.” 브루토의 하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A는 꾸벅 인사를 하고 우리 있는 데로 돌아왔다.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우리는 마지막 동전 한푼이 떨어지기까지 사흘인가 더 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순진한 시절이었다. 그 후로 흘러온 세월이 30년. A는 지금 대학 교수가 되었고 친구들도 각기 제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었다.
지난 주,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는데 그 사이에 모두들 열심한 크리스천이 되어 있었다. 30년 동안 헤어져 있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한길로 다시 만나고 있었다는 감사가 새로웠다.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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