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단절 30년만에 이어진 ‘ 덩더궁 ‘

2004-09-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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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 배우는 마샤 김씨

요즘 미샤 김(44, 광고인)씨의 주말은 아파트에서 커다란 장구를 꺼내 차에 낑낑대며 싣는 것으로 시작된다. 불혹의 나이에 난데없이 장구와 바람이 난데에는 평소 알고 지내던 후배의 탓이 크다. “언니, 저 요즘 장구 배워요”라는 후배의 말이 그녀의 뇌리에 깊은 울림으로 공명됐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4-12세 때까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에 고전무용을 했었다. 인간문화재였던 스승의 이름이야 지금 가물가물하지만 그녀는 선배 언니들의 공연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스스로 무대 위에 섰던 경험들을 새록새록 기억해냈다. 5세 때는 창작 무용 대회에서 어린이 부문 금상 트로피를 받기도 했다니 결코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춘향 격으로 했던 무용은 아닌 셈이다.
할머니의 꿈을 이루어드리려는 효성에 열성이었다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진정 춤을 즐기고 좋아했었던 것 같단다. 피아노는 배우다말고 도망 다니면서도 무용 수업은 빠지지 않고 나갔다니.
올해 5월, 그녀는 장구를 배우겠다고 후배를 따라 선화 무용 학원(원장 김미자)을 찾아갔다. 첫 수업 시간, 열채와 궁채를 잡으며 설레던 가슴은 장구를 ‘덩’ 내려치는 순간 피가 끓는 듯 벌렁거리고 목이 멜 정도로 반갑고 서럽기까지 했다. 장구가 그녀를 향해 “어디 갔다 이제 왔니” 하며 물은 것과 똑같이 그녀 역시 장구에 대고 물었다. “어디 갔다 이제 왔어.”
온 신경 세포를 집중했지만 30년 넘는 세월 동안 묻어 두었던 걸 다시 하려니 어지간히 서툴고 엉성했다. 채 두드리는 내내 팔딱팔딱 뛰는 심장으로 인해 수업을 마쳤을 무렵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얼마 전 한국 무용단원의 LA 공연을 보러 간 그녀의 눈에 장구치는 젊은이가 유난히 또렷이 들어왔다. 이제 갓 20대 중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가 어쩌면 저리도 조상들의 가락을 신명나게 연주할 수 있는 걸까.
그녀는 반질반질 손때 묻은 장구를 나이 들어서도 계속 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다. 아무래도 그때가 되면 자진모리보다는 한이 배어 있는 굿거리장단을 더 자주 두드릴 것 같다. 요즘 장구를 치는 그녀의 마음은 명상을 하듯 편안하다. 학원의 것을 빌려다 집에서 연습하고 있는 그녀는 한국에 주문해 놓은 장구가 언제나 도착할까 매일 목을 빼고 기다린다.
장구를 둘러매고 두드리며 춤도 추는 설장구도 배울 예정. 예쁜 장구를 매고 나비처럼 요염한 자태로 맘껏 희롱하듯 기교를 부리는 경지에 오르는 게 그녀의 목표다. 아마도 내년쯤이면 그 꿈을 이루게 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녀가 다니는 선화 무용학원은 약 2년 전에 개원한 짧은 연륜이지만 각종 커뮤니티 행사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고. 최근 광복절 기념행사 때는 원생들이 샌 페드로 우정의 종각 타종식에 참가해 부채춤을 공연했다.
그녀도 함께 연습을 했었지만 어쩐지 머쓱해져서 공연 참가는 그만두었다. 장구 채를 다시 잡은 것도 벌써 4개월째. 내년의 어느 가을 날, 치맛자락을 잡아 올린 고운 자태의 그녀가 장구를 매고 공연을 펼칠 순간을 기대해 본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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