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커피 한잔 마셔도 편안한 ‘환상 공간’

2004-09-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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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에네가 ‘로란제리 바’

외국인들이 밝히는 ‘내가 한국에서 너무 오래 살았구나’ 싶은 순간들. 식탁 위에 화장실 용 두루마리 화장지가 올라와 있는데도 그다지 눈에 거슬리지 않을 때. 저녁 식사로 3,000원짜리 비빔국수를 먹은 뒤 1만원짜리, 말 그대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가격의 커피를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을 때.
사실 우리들에게는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당신이 한국 땅에서 자라 대학 시절을 보냈다면 학교 앞 상아탑 분식점에서 300원 짜리 라면으로 저녁을 때운 뒤 카페 장 크리스토프에서 2,000원짜리 커피를 마셨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본래 한국 음식 가운데는 탕이나 국수, 즉석구이처럼 호떡집에 불난 듯 후다닥 먹어치워야 제 맛인 것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저녁을 먹은 장소에 계속 눌러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좀 그렇다. 비록 저녁을 싸구려로 먹었더라도 우아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 그날의 만남은 파리의 연인, 박신양 표 럭서리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당신이 오늘 저녁 맥도널드나, 2.99달러짜리 설렁탕을 먹었다 하더라도 기죽지 마시길. 식후 드링크나 커피 한 잔을 모나코의 왕비가 부럽지 않은 곳에서 하면 되니까. 로란제리(L’Orangerie)의 바는 이런 밤을 위해 꼭 맞는 곳이다.
로란제리의 건물은 휘황찬란한 금빛 간판과 격조 있는 출입구부터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는 꽃꽂이가 압도적이다.
매주 꽃꽂이 디자이너와 직원들이 5시간 넘게 준비하는 이 꽃은 말 그대로 예술작품. 의자와 가구들은 귀족의 것인 양 호화롭고 테이블 위에 밝혀진 촛불은 은은한 빛을 발한다. LA에서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하며 우아하고 로맨틱한 곳은 다시없다.
바에는 보글보글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가 사근댄다. 높다란 천장 아래에 놓여진 그랜드피아노는 훌륭한 연주자를 만나 가장 영롱한 멜로디를 공명한다. 유리 문 너머 중앙 뜰에는 자연채광을 통해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오늘 우리는 저녁을 이미 먹었으니 이곳에서 100달러는 족히 나올 디너를 주문할 이유는 없다. 바에 앉아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며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음악을 즐기면 그만이다.
커피에 디저트 한 쪽이라도 더하고 싶다면 오렌지와 그랑마니에 수플레(Orange & Grand Marnier Souffle)를 주문하자.
음, 이 맛! 과연 베르사이유 궁전의 마리 앙뜨와네트가 이런 호사를 누리며 살았을까.
조금 더 사치를 부리고 싶다면 샴페인과 몇 가지 바 메뉴를 주문해도 좋다. 철갑상어 알과 달걀 요리(Eggs in the Shell with Petrossian Sevruga Caviar), 전통적인 스타일로 요리한 프와 그라(Terrine of Foie Gras)는 샴페인 안주에 딱이다.
오픈 시간: 화-일요일 오후 6-11시. 피아노 연주는 화-목요일 오후 7시부터. 드레스 코드: 정장, 남자는 자켓이 요구된다. 가격: 전채는 18-35달러. 후식은 12-14달러.

주소 903 North La Cienega Bl. Los Angeles, CA 90069 한인 타운에서 Melrose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가 La Cienega를 만나 우회전하면 왼쪽으로 나온다.
전화 (310) 652-9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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