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차 타고 온 남자’(Man on the Train)★★★★★

2003-05-09 (금)
크게 작게
황혼기 두남자의 상반된 삶과 우정

우수가 가을 안개처럼 인체의 기공을 서서히 채우고 들어오는 시적이요 철학적이며 샹송 같은 프랑스 갱스터 영화다. 인상파 화가의 푸른 질감이 물씬대는 가을 그림을 보는 기분에 젖는데 우정과 운명과 인생의 선택 및 자기 삶과 다른 삶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일체의 꾸밈이나 허식 없이 지극히 단순하게 이야기한다.


유머와 비감과 깊은 감정을 마음껏 끄집어내 걸맞지 않는 두 남자의 우정과 관계를 선험적인 경지로 끌어올려 아름답고 부드럽게 묘사, 처연하고 묵직한 감동에 빠져든다. 심오한 연기에 의해 표현되는 인물과 성격묘사가 빼어나게 섬세한 ‘사나이들의 영화’로 염세적일 정도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맛보는 기분이 코냑을 마시며 취기에 젖어드는 셈이다.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한 기차에서 오래된 가죽 재킷을 입고 세파에 절은 얼굴을 한 늙어 가는 갱스터 밀랑(자니 할리데이-프랑스 최고의 팝가수 중 하나)이 내린다. 얼굴에 마음대로 난 수염과 고목껍질의 감촉을 느끼게하는 피부에 사해같은 눈을 가진 밀랑은 피곤 바이러스 보균자같다.

묵을 곳을 찾는 밀랑에게 말끔한 차림의 우아하고 세련된 은퇴한 노시학선생 마네스키에(장 로쉬포르)가 자기 혼자 사는 오랜 대저택에 묵으라며 호의를 베푼다. 밀랑과 마네스키에는 모든 것이 정반대의 두 남자. 밀랑은 과묵하고 냉소적이며 조심스런 반면 마네스키에는 말이 많고 노신사의 매력을 지닌 정리 정돈된 사람이다. 이런 둘이 한 집에 있게 되면서 두 남자간에 서서히 우정이 영글고 이 우정은 상호 존경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밀랑은 토요일 범죄 동료들과 함께 이 마을의 은행을 털기 위해 기차를 타고 왔다. 그리고 마네스키에는 같은 날 심장수술을 받기로 돼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밀랑과 마네스키에의 관계 묘사가 매우 유머러스하고 다정한데 두 남자는 서로 상대방을 자신의 못 이룬 삶의 반쪽으로 여기며 끊을 수 없는 운명의 탯줄로 매어진다. 마네스키에는 밀랑으로부터 사격을 배우며 은행강도 짓이 얼마나 신날까 하고 상상하고 밀랑은 조용하고 편안한 은퇴자의 여유를 잠시나마 즐긴다. 그러나 둘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에는 이미 모두 너무나 많은 세월을 살았다.

마침내 토요일. 밀랑은 은행으로 마네스키에는 병원으로 각기 떠난다. 클라이맥스가 강렬하다. 회한과 페이소스가 가을 공기처럼 스산하니 감정을 적셔주는 무드 짙은 영화로 베테런 로쉬포르의 연기도 좋지만(천진난만한 소년 같다) 할리데이의 체한 것 같은 연기가 내내 가슴에 남는다.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 PG. Paramount Calssics. 파인아츠(310-652-1330), 로열(310-477-5581), 사우스코스트 빌리지3(샌타애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