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족 집성촌 “엄마야… 누나야… 같이 살자”

2003-01-0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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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 커뮤니티 주택 여러 채 구입 가족끼리 모여 살아
경제적·정서적으로 도움… 다세대 듀플렉스 등도 인기
한지붕 3세대 급증… 건축업체들 대가족 타겟 개발나서


옥병광 남가주 한인무역협회장의 네 자녀들은 모두 반경 5분 거리에 모여 산다. 막내와 출가한 딸네 가족은 한 집에서 살고, 두 아들 가족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둥지를 틀었다.

비즈니스 특성상 집을 자주 비우는 옥 회장은 “아내가 적적해 하지 않고 자녀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좋다”고 함께 사는 즐거움을 말한다. 오렌지카운티 게이티드 커뮤니티 내 거주하는 김모씨도 최근 단지 내 출가한 두 아들 몫으로 집 두 채를 마련해줬다. ‘같이 사는 행복’을 즐기고 싶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이들처럼 ‘한 지붕 두 세대’ 혹은 출가한 자식들을 지근거리에 두고 사는 한인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부동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 같은 현상은 주류사회에도 확산, 일부 에이전트나 건축업자들은 아예 대가족 그룹을 겨냥,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경제적 이점과 정서적 만족

전통적으로 나이가 들면 부모 곁을 떠나는 미국의 ‘이별형’ 가족형태가 한 지붕 아래 혹은 한 동네에 다시 모여 사는 ‘재결합형’으로 바뀌고 있다. 이에 따라 대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큰집을 찾거나 한 지역에서 여러 채의 집을 동시에 샤핑하는 바이어도 급증했다.
부모를 부양하고 자신의 은퇴 후를 대비하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경제적인 보조를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다는 면에서, 누군가가 바로 옆에 있다는 안정감 등 이유는 갖가지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다. 재정적으로 안정이 안된 가족과 친척들의 경우 다세대 거주형 듀플렉스나 큰 주택 등을 함께 구입하면 다운페이나 페이먼트의 부담이 적은데다 정서적인 만족을 동시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뉴저지 러더포드시의 경우 이 같은 다세대 거주형 단독주택이 잇달아 들어서고 있다. 일부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한 에이전트의 경우 가족이나 친척과 같이 살 주택을 찾는 바이어가 10%에 가깝다고 한다. 이 에이전트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거의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고 말한다.

이 흐름에 한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풀러튼이나 가든그로브처럼 베드타운으로서 적절한 주택가가 유지되고 있는 지역에는 두 가족이 살 수 있는 듀플렉스나 게이티드 커뮤니티 안에 여러 채를 한번에 구입하려는 바이어들이 적잖다. ‘뉴스타 부동산’의 린 최씨는 “가족끼리 집성촌을 이루기로는 최고인 리틀 사이공의 베트남인들처럼 가족끼리 모여 사는 한인들도 꽤 늘었다”고 전했다.

‘재결합’이 늘어난 데는 가족을 한 테두리 안에 묶으려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정서도 한 몫하고 있다. 말로만 가족이지 만나면 서먹서먹한 형제자매 사이가 아닌 가까이 살면서 명절과 경조사도 함께 하는 등 ‘한 가족’임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됐던 김씨처럼 재정이 뒷받침되는 한인들 중에는 출가한 자녀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인근에 주택을 마련해주던가 혹은 듀플렉스를 구입하는 식으로 재결합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다세대 거주형 주택들은 두 세 가정이 함께 살아야 하는 크기이므로 보통 가격이 만만치 않고 매물도 많지 않은 실정이다.


◆건축업자들의 발 빠른 대응

이미 변화의 분위기를 감지한 에이전트들 중에는 아예 대가족 그룹을 타겟으로 주택판매에 나서고 있다. 인척 아파트(in-law apartment)나 2개의 매스터 베드룸이 있다고 강조하며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샌드위치 제너레이션’을 위한 집이라는 아이콘을 만들어 바이어를 불러들이기도 한다.

애초부터 대가족을 겨냥해 주택을 설계하는 건축업자들도 있다. 은퇴자를 위한 주택단지를 짓는 ‘델 웹’(Del Webb)의 경우 암벽 등반 시설부터 빙고 게임룸까지 갖춰 은퇴자와 손자, 손녀들도 공존할 수 있는 ‘다세대(multigenerational) 공존형’ 주택을 선보이기도 했다.

북가주 건축업자인 루이스 아파트 커뮤니티도 ‘홈커밍’(Homecoming)이란 개발 계획을 진행중이다. 이 단지 안에는 아동센터와 업무용 오피스, 요가 클래스 등 자연스럽게 여러 세대가 섞일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이 만들어지고 있다. 단지 휴식처가 아닌 사회적 인프라를 갖춰진 거주공간을 꾸미는 것이다.

◆베이비 부머들의 변화

이민생활에서 친인척끼리 의지하는 소수계의 특수성이 한인들의 ‘모여 사는’ 트렌드를 설명해 준다면 미국인들의 재결합 현상은 중년에 이른 베이비 부머들의 특성과 재택 근무의 증가 등 인구통계학적인 요인과 사회적 변화 때문이다.

달라스의 조사기관 ‘퓰테 홈스’에 따르면 자식과 함께 살고 있지 않은 주택소유주의 절반 이상은 그들이 은퇴하면 자녀들이나 손자, 손녀와 함께 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2년 전에 비해 2배나 증가한 수준이다.
최근 센서스에서도 한 지붕 아래 3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가구 수는 지난 20년 간 두 배로 치솟았으며 분가 뒤 다가 원래 집으로 돌아가는 성인 수도 6% 증가했다.

고령 인구가 급증하면서 노인이 된 부모들이 자녀와 합치거나 보살핌을 받기 위해 인근으로 이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특히 40대와 50대에 다다른 베이비 부머들은 부모를 모시고 장기적으로는 자신들의 은퇴를 대비하기 위해 여러 가족이 한 곳에 모이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베드 타운인 비 도심지역은 지난 수 십년간 4배 가까운 성장을 보였다.

지난 90년 이후 집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가 23% 가까이 증가한 것도 거주선택의 자유를 확대해준 요인이다. 과거처럼 직장 때문에 동부에서 서부로, 서부에서 동부로 이별하는 대신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배형직 기자> hjba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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