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사람의 주말나기 수화통역으로 봉사하는 방송인 유수옥씨

2002-12-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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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사랑, 손으로 말해요”

탐 크루즈와 르네 젤위거가 주연했던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기억나는 명장면이 있다. 한 농아 부부가 수화로 나누는 대화를 부러운 듯이 지켜본 도로시는 제리에게 그 대화 내용을 일러준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것보다 더한 표현이었다. "나의 존재는 비로소 너의 존재로 꽉 차 올라(You make me content)." 손으로 나누는 그들의 대화에는 목소리의 울림보다도 더한 공명이 있었다.

지난 주말 코리아타운 갤러리아에서 열렸던 라디오 서울의 공개방송에서 유수옥(방송인)씨를 만났다. 매일 ‘행복한 오후’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목소리도 아름답고 말솜씨도 뛰어난 그녀는 그날 저녁 말이 없었다. 청각 장애자들을 위해 수화 통역을 맡았던 그녀는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고 온 몸으로 말을 했다. 그러나 그 감동은 미성의 매끄러운 말솜씨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지난 1996년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한 유수옥씨의 충격은 컸다. 전 존재였던 피아노를 더 이상 칠 수 없었고 보통 사람들의 일상 행위조차 혼자서 해낸다는 것이 힘들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장애인들의 답답한 형편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잠깐 팔이 아프다고 이 난리인데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그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평소부터 갖고 있던 표현의 수단, 언어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을까. 장애인들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장애인 사역을 사명으로 여기는 한 목회자로부터 수화를 배움으로 구체화됐다.

프랑스어를 이해하고 떠난 프랑스 여행은 "봉쥬르" 인사 하나 하지 못할 때와 결코 동일할 수 없다. 그녀는 수화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방인으로 느껴지던 청각 장애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결코 소리를 드높이는 법이 없다. 단지 손동작이 커지고 힘이 실릴 뿐이다.

사랑해, 기뻐, 행복해, 예뻐, 가슴 아파. 수화로 말하고 있는 그녀가 무얼 의미하는지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사랑의 고백인지 고맙다는 표현인지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예쁜 것을 볼 때면 마치 볼에 우물처럼 보조개를 찍는 동작을 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왼 손으로 주먹을 쥐고 그 위를 오른손으로 쓰다듬어 표현한다.

수화로 말할 때는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닳고닳아 유행가 가사 같은 사랑한단 표현보다 불공드리듯 손을 비비는 이 고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든 언어 실력은 얼마나 사용하는가에 달려있다. 가까이 지내는 청각 장애자 친구 부부와의 친분으로 그녀의 수화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그녀에겐 그들과 함께 온몸과 마음을 모은 표현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수화 역시 약 6개월 정도 배우고 익히면 기초 회화 정도는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 수화가 전세계 공통어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어 수화, 한국어 수화 따로 배우지 않아도 될 테니.

그녀는 꿈을 꾼다. 엄마의 마음을 담은 수화로 자녀에게 사랑을 전하고 손으로 동화를 읽어주는 밤을. 아이는 자라나서 그녀가 쏟아 부어주었던 사랑의 분량만큼 이웃들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게 되리라.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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